비에 젖어 몸이 무겁기만 합니다. 아직 캐지 못한 하지 감자를 걱정하다 나이가 든다는 것, 산다는 것은 대책 없이 젖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젊어서 비는 마음 한 귀퉁이만 적시고 흘러갔지만 지천명 지나 내리는 비에는 한 생애가 다 젖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비도 사랑입니다. 비가 오는 날 항공기를 탄 적이 있습니다. 항공기가 세찬 비와 검은 비구름을 뚫고 하늘 위로 솟아오르자 그곳에는 고요한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황홀했습니다. 착한 사람이 죽어서 돌아간다는 하늘이 그런 곳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 비를 뿌리는 하늘 위에는 눈부신 또 다른 하늘이 빛나고 있습니다. 울다 그치고 활짝 웃는 아이 얼굴처럼 말입니다. 비는 그런 얼굴을 보여주고 싶어 내리는 겁니다. 개울이든 강이든 큰비 뒤에 붉은 흙탕물이 흘러내려오는 것도 비의 심장 부근에는 사람처럼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냥 젖어 있을 수만 없어 은현리 텃밭을 둘러보려고 나서다 낡은 우산 하나를 보았습니다. 선후배 모임에 우산 없이 나갔다가 갑자기 내리는 비에 비 맞고 돌아오려는데, 젖지 말라고 선배가 쓰고 있다 선뜻 내어준 우산이었습니다. 우산 손잡이에서 아직까지 따뜻한 사람의 체온이 전해져 왔습니다. 마음을 적시는 것은 비가 아니라 사랑이라고 고쳐 생각합니다. 진짜 비는 그때부터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시인ㆍ경남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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