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사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전국국어교사모임이 공동 주최하는 문장청소년문학상 2011년 5월 시 장원에 이은선(고양예술고ㆍ필명 필름느와르)양의 ‘페루’가 선정됐다. 이야기글에서는 배혜지(장유고ㆍ필명 naR)양의 ‘연(緣)’, 생활글에서는 박여주(풍문여고ㆍ필명 여지)양의 ‘할머니의 노점상’, 비평ㆍ감상글에서는 한승용(산남중ㆍ필명 韓雪)군의 ‘My name is Khan, and I’m not a terrorist’가 각각 월 장원에 뽑혔다. 당선작은 ‘문장 글틴’ 홈페이지(teen.munjang.or.kr)에서 볼 수 있다. 한국일보사 한국문화예술위 전국국어교사모임은 문장 글틴 홈페이지를 통해 연중 온라인으로 청소년의 글을 공모하고 있다.
페루
이은선
현기증처럼 찾아오는 어느 고산지대의 해질녘
인디오 소년들이 한 떼의 양을 몰고 좁은 들판을 내려간다
세상의 모든 저녁 위에 걸쳐진 어둠과
천천히 지워져가는 지루한 시간들
이 긴 나라 안에서는 고요만이 유일한 화법이라는 듯
때때로 그들은 입 안에서 웅얼웅얼 맴도는 말들이
모래바람처럼 지나가는 조상의, 이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들 스스로의 이름을 봉인해둔 채
해가 뜨고 밤이 오고 또 해가 뜨기를 기다리며
멍하니 양털을 쓰다듬고 있는지도 몰랐다
한 줌의 건조한 모래로 흩어지던 때의 바람소리를
지금 와서야 귀 기울여 듣고 있는 일
모두가 있지만 또 아무도 없다는 듯,
양떼와 라마와 울음소리 처량한 모든 짐승들의 그림자가
조용히 지도 속 가파른 지형을 오르내린다
언제부터였는지 누가 지었는지도 모를 민요를 흥얼거릴수록
더 흐릿해지는 먼 산의 윤곽과 달그림자
어딘가 이정표처럼 깃발이 흔들린다
우리 내일은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자
한 떼의 양을 몰고 들판을 내려가던 소년들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농담을 주고받는다
소년들을 기다리는 집집마다 드문드문 불빛이 잦아드는 천막 안
쉼 없이, 이름 모를 풀을 뜯어 먹으며 푸른 입술로
푸르게 시들어가는 서로의 얼굴에 칭얼거림을 묻어두는 아이들
식어가는 냄비 앞에서 이름을 버린 여자들이
앞치마에 돋아난 보풀을 오래 내려다보고 있다.
▦선정평
페루는 먼 나라가 아니라 우리가 잊고 있던 또 다른 삶의 버전인 듯 싶다. 우리의 삶이 붙박이가 아닌 여행이라면 페루는 그 해발 고도를 보여주는 유년의 파노라마가 아닐까. 모노톤의 고즈넉한 풍경임에도, 가잘빌 데 없어라, 페루의 선한 눈망울이여.
유종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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