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가 이런 적은 없었다. 정부와 정치권에 불만이 있어도 최대한 완곡하게, 가급적 에둘러 의사를 표시해온 것이 대기업들의 습성. 하지만 경제단체대표들은 지금 약속이라도 한 듯 연일 발언강도를 높여가고 있다. 화법도 점점 직설적이 되어가고 있다.
재계가 쏟아내는 화살은 정부와 정치권 양쪽 모두를 겨냥하고 있다. 우선 MB정부에 대해 재계는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비즈니스 프렌들리(기업친화)'의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정부였고, 실제로 규제완화 감세 등의 공약도 있었기 때문에, MB정부에 대한 재계의 기대는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하지만 '친기업'노선이 '친서민'으로 바뀌고, 대기업에 대한 정부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재계에선 "속았다" "지난 정부보다 더 좌파적이다"는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전경련 관계자는 "지난해 동반성장 이슈부터 초과이익공유제, 기름값ㆍ통신비 인하요구까지 재계가 당초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고 말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기업인들이 만나면 '참여정부는 왼쪽 깜빡이를 켜고 오른쪽으로 운전했는데 지금 정부는 오른쪽 깜박이를 켜고 좌회전하는 것 같다'고들 얘기한다"고 최근 분위기를 전했다.
재계는 지금 정부가 정말로 시장경제를 수호할 의지가 있는지에 대해서까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24일 열린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과 경제5단체장 상견례에서 허창수 전경련 회장이 '원칙'얘기를 꺼낸 것도 바로 그런 맥락이다. 그는 "오늘날 중요한 정책결정에서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는 순수하고 분명한 원칙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정치권에 대해선 더 냉소적이다. 기본적으로 정치권이 내년 선거를 의식해 현실성이 떨어지는 선심성 정책을 남발한다고 보고 있다. 야당은 그렇다 해도 보수정당인 한나라당이 포퓰리즘과 재계 때리기에 더 앞장서는 것에 더 당혹해 하고 있다.
복수노조 시행을 골자로 한 새로운 노동조합법, 반값 등록금 등이 대표적인 예. 이희범 경총 회장은 이날 이사회에서 "최근 노동계가 주장하는 노조법 전면 개정에 야당은 물론, 여당 일부도 동참하고 있다"며 "현 시점에서 법 개정 논의는 산업현장의 혼란만 가중시킨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앞서 대한상의는 "학교 무상급식과 반값 등록금은 사회복지제도가 발달한 선진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라고 꼬집었다.
재계는 내년 선거국면에 접어들면 상황은 더 심각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선거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렇게 포퓰리즘 정책들이 쏟아지는데 내년엔 얼마나 더 심해지겠느냐는 것이다. 특히 내년 선거는 '복지'쪽에 초점이 맞춰질 수 밖에 없는데, 이 경우 선심성 공약남발은 절정에 달할 것이란 우려다.
재계는 이와 관련, 허창수 전경련회장과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 등 총수들에 대한 정치권의 소환 움직임도 재계를 향한 기선잡기로 해석하고 있다. 10대 그룹에 속하는 한 기업 고위관계자는 "이번에 총수들이 (국회에) 나가면 앞으로 툭하면 부르는 일이 비일비재할 것"이라며 "욕을 먹더라도 군기잡기식 소환에는 불응해야 한다는 것이 재계의 정서"라고 전했다.
최연진기자 wolfpack@hk.co.kr
송태희기자 bigsmil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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