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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손, 무기와 악기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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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손, 무기와 악기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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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4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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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친탁을 한 나는, 딸이 아버지를 닮으면 잘 산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덕담으로 알았던 그 말은 나중에 보니 어머니를 닮았으면 예뻤을 것이라는 유감의 다른 표현이었다. 어머니를 닮은 데가 꼭 한 군데 있긴 했는데, 그게 하필이면 손이었다. 문제는 어머니의 손이, 고운 '마님' 외모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무수리'의 그것이었다는 점이다.

내게 유일한 모계 유전의 흔적인 못생긴 손. 뻣뻣하고 마디도 굵고 힘줄마저 고스란히 드러난 우락부락한 손에 대한 일종의 콤플렉스에서인지,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그 사람의 손부터 보는 버릇이 생겼다. 얼굴은 육체의 영혼이며 모든 것이 얼굴에 있다고 하지만, 초면에 빤히 쳐다보기도 그렇고 이리저리 훑어보기는 더 민망하여 나름대로 생각해 낸 소심한 탐색전이기도 하다. 어느 시인처럼, 손을 보고 그의 삶의 전부를 읽어내는 재주는 없어도, 손이 그가 어떤 사람일까에 대한 단서가 되어 주는 것만은 분명하다.

오래 마음에 두고 있던 전각 공부를 한다고 내혜 김성숙 선생님의 작업실을 찾아간 날도, 버릇처럼 그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굳은살에 힘줄이 드러난, 외모와 작품이 풍기는 단아한 이미지와는 달리 크고 단단하고 다부진 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칼과 돌을 다루는 손이 아닌가. 그러나 작은 돌 위에서 잔물결처럼 일렁이던 조용한 손끝에서 펼쳐진 세상은 더없이 유려했다. 돌은 노래하고 시간은 춤을 추었다. 어디서 보았더라?

"나는 곡괭이와 산투리를 함께 다룰 수 있는 그의 손을 보았다. 두 손은 못이 박이고 터지고 일그러진 데다 힘줄이 솟아나와 있었다. 그는 여자의 옷이라도 벗기는 것처럼 섬세하고 주의 깊은 손놀림으로 보따리를 열고 세월에 닦여 반짝이는 산투리를 꺼냈다."(니코스 카잔차키스)였다. 앤서니 퀸이 그 둔중한 몸으로 너울너울 춤을 추던 영화의 한 장면도 떠올랐다.

곡괭이와 함께 한 지난한 시간들이 없었더라면 그의 산투리가, 그의 춤이 그렇게 간절하고 아름다울 수 있었을까. 우리 모두는 잠재적 화석이며, 우리 안에는 존재했다가 사라진 무수한 세계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로렌 아이슬리의 통찰은 옳다. 화가보다는 조각가로 불리기를 원했던 미켈란젤로가 조각이란 돌이 품고 있는 그 본연을 깨우는 것이라 했듯이, 전각도 작은 돌 속에 화석이 된 나의 세계를 깨우고 나의 본연을 발굴하는 일이다.

오늘도 나는 나를 발굴하기 위해 고작 5cm도 못 되는 작은 연습 돌을 가만히 응시한다. 머리와 어깨가, 눈과 귀가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를 견디며 보고 듣고 생각하지만, 무언가를 하는 것은 언제나 손이 아니던가. 곡괭이를 던져버리고 산투리를 연주하고 싶어 안달이 난 내 손은 그러나 서툴기 이를 데 없다. 조급증과 욕망으로 긁히고 베인 상처만 늘어간다. 아직 갈 길이 먼 모양이다.

노년의 어머니께서 손수 쓰신 반야바라밀다심경으로 우리 육남매에게 똑같이 남겨 주신 병풍을 거풍하는데 한 자 한 획 속에 어머니의 못생긴 손이 겹쳐졌다. "가만히 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솨아솨아 흘려 보낸 작은 오솔길이/ 와락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문정희, '손의 고백' 중에서)

못생긴 내 손이 누군가를 감동시키는 날, 그날이 내게도 올까? 거거거중지 행행행리각(去去去中知 行行行裏覺). 가고 가고 또 가다 보면 알게 되고, 하고 하고 또 하다 보면 깨닫게 된다니, 오늘도 나는 마음을 갈고 몸을 새긴다.

성혜영 박물관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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