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3일 오후 서울 도봉구의 한 주유소. 경유를 넣으려고 주유소에 들어서던 운전자 차모(44)씨는 '경유 없음'이라는 안내문을 보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차씨는 "1주일에 한 번 꼴로 들르는데 주유소에 기름이 없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본다"며 "전쟁 난 것도 아닌데 이게 무슨 일이냐"고 말했다. "3일 전부터 경유 공급이 끊겼다"는 주유소 관계자는 "정유사에 계속 기름을 달라고 요청하지만 아무 답이 없다"고 말했다.
#2. 같은 날 오전 경기 고양시의 한 주유소. 사장 양모(48)씨는 "기름 공급이 끊길까 봐 하루하루 심장이 떨린다"고 했다. 저장 탱크 용량이 작아 이틀이 멀다 하고 기름을 받아야 한다는 그는 "지난 주에 휘발유가 제 때 안 와 한 쪽 탱크에 있는 기름을 손으로 펌프질을 해가며 다른 탱크에 나눠 담느라 소동을 벌였다"고 했다. 양 사장은 "이번 주는 경유가 말썽"이라며 "제 때 기름을 못 받아 손해 본 주유소들이 정유사를 상대로 소송을 한다는 말도 나온다"고 전했다.
기름으로 가득 차야 할 주유소에 기름이 없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오일쇼크가 온 것도 아니고, 주유소들은 "장사 시작하고 처음 있는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 이유에 대해 주유소들은 정유사를 탓하고 있다. 하지만 정유사들은 주유소의 문제라고 반박하고 있다. 기름부족사태는 진실공방으로까지 번지는 양상이다.
주유소 탓?
정유사들은 주유소에 기름이 없는 게 아니라 주유소들이 기름을 사재기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다음달 6일로 ℓ당 100원 할인판매기간이 끝나 곧 기름 소매가격이 오를 것이기 때문에, 주유소들이 사재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매점매석 현상은 일부 사실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한 주유소 사장은 "일부 주유소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면서 "하지만 그건 여러 주유소를 운영하는 극히 일부의 얘기"라고 말했다. 서로 다른 정유사의 폴(간판)을 달고 2~3개 주유소를 운영하는 업주는 여러 개의 탱크를 활용해 길게는 한 달치 제품을 싼 가격에 가져올 수 있어 사재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수도권에서 주유소 3개를 운영한다는 김모(가명)씨는 "싸게 사서 비쌀 때 파는 것은 장사의 기본"아니냐며 "100원 가격 인하로 손해 본 게 얼마인데 그걸 누가 보상해 주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대부분 주유소들은 사재기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한 주유소 사장은 "보통 주유소는 저장용량이 길어야 2주분 정도"라며 "어디 숨겨 놓을 데도 없는데 어떻게 사재기를 한단 말이냐"고 말했다.
정유사 탓?
주유소 업주들은 오히려 정유사들이 다음달 7일 이후 기름 값이 오른 후 팔기 위해 일부러 공급량을 줄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일산지역 한 주유소 업주는 "정유사가 공급량이 부족하다며 같은 간판을 단 주유소들도 어디는 더 주고 덜 주고 하는 식으로 양을 조절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유사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펄펄 뛰고 있다. 실제 서울 및 수도권에 공급되는 기름 대부분이 거쳐가는 대한송유관공사에 따르면 GS칼텍스의 경우 이번 주 들어 지난 주에 비해 물량이 20% 정도 줄었지만 나머지 정유사들은 큰 변화가 없다고 밝혔다. GS칼텍스 측은 이에 대해 "송유관 공사를 통해서 전체 물량의 절반만 공급받는다"고 설명했다.
"누구 탓도 못해"
누구의 사재기나 공급조절 때문이 아니라 100원 인하로 인해 수요 자체가 늘었고, 결국 기름공급이 부족하게 됐다는 지적도 있다. 공급가를 동결한 SK에너지를 뺀 3개 정유사들은 한결같이 "기존에 없던 수요가 늘었다"고 입을 모은다. 현대오일뱅크 관계자는 "심지어 SK에너지 주유소 중에서도 다른 정유사에서 기름을 구매하는 경우가 생겨나고 있다"면서 "장기 공급 계약을 맺은 수출 물량을 줄일 수도 없고 생산량을 늘리는 것도 한계가 있는 만큼 공급 부족은 누구 탓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업계에선 어쨌든 7월6일까지는 일정 정도 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주유소 사장은 "보통 월 말에 가격이 싸서 월 말에 최대한 많이 제품을 확보한다"며 "이달 말에 너나없이 제품을 최대한 확보하려 들 것이 뻔하고 물량 확보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주유소 관계자는 "당장은 부족사태가 해결되기 쉽지 않을 것 같다"면서 "부분적이나마 사재기나 공급조절이 더해진다면 운전자들은 기름 넣기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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