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총을 들고 싸우는 편이 나을 듯싶었다. 전우들은 하나 둘 적의 총탄에 쓰러지고 사방에 참혹한 모습의 시신들이 널브러진 곳에서 초초함을 억누르며 붓을 든 관찰자에 머무는 것은 고역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역사의 순간을 그림으로 남겨야 했다. 6ㆍ25전쟁 때 최초로 전장에 투입된 종군화가 고 우신출(1911~1991) 화백은 그렇게 소리 없이 전쟁을 치렀다.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고인의 수채화와 유화, 스케치 95점이 공개된다. 둘째 아들 성하(63)씨가 선친의 유작들을 모아 23일 전쟁기념관에 기증하기로 한 것. 기념관측에서 “이 귀중한 자료들을 정말 기증할 생각이냐”고 되물을 정도로 가치를 평가 받고 있다.
우씨는 “부친이 전장에서 목숨 걸고 그린 작품들에는 전쟁의 비극과 민족의 아픔이 녹아있다”며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보고 6ㆍ25의 교훈을 되새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우 화백은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1950년 9월28일 부산을 출발해 10월20일까지 23일간 서울과 고성을 거쳐 원산에 이르는 동부전선에 투입됐다. 북한군이 패주하면서 38선 이북으로 전선이 확대되자 공보처에서 현장기록과 작전지도 작성, 북한 주민 선무활동 등을 위해 화가들을 수소문했고, 우 화백을 비롯한 부산지역의 화가 6명이 기꺼이 응했다. 덕분에 그는 6ㆍ25 전쟁 발발 이후 남한에서 38선을 넘은 최초의 민간인이기도 하다.
우 화백은 축구선수 출신으로 매사에 적극적이었다. 경남도 장학사를 지내며 종군문인들의 모임인 문총구국대에 가입했다. 우씨는 “마흔의 나이에다 가족들의 반대도 심했지만 굳이 전장으로 달려가셨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전쟁터는 지옥이었다. 포연이 멎은 곳마다 시신이 산더미처럼 쌓여 까마귀 떼와 파리가 우글거리고 썩는 냄새에 제대로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우 화백은 포로로 잡힌 어린 북한 병사의 파편 맞은 머리에 구더기가 꿈틀대는 것을 보고 구토를 하기도 했다. 북쪽으로 도주하지 못하고 숨어있던 북한군 잔당의 공격에 화가 몇 명은 목숨을 잃었다.
우씨는 “상상을 초월한 참혹한 광경에 부친이 차마 붓을 들 수 없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며 “도주를 위해 밤에 신발을 신고 자야 할 정도로 상황이 급박했지만 붓과 물감, 도화지는 늘 품에 안고 주무셨다”고 말했다.
기증한 작품에는 38선을 넘어 진군하는 국군, 행군 도중 쉬고 있는 병사들, 국군을 환영하는 북한 주민 등 당시의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우 화백은 종군화가로서의 공을 인정받아 녹조소성훈장(60년), 국민훈장목련장(71년)을 받았다. 전쟁 후에는 부산 지역 중학교 교장으로 재임하며 평생 1,000여점의 그림을 남겼다. 그는 또 예술가적 상상력을 발휘해 전국체전에서 국내 최초의 카드섹션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씨는 “전쟁 하면 자극적인 장면만 떠올리는 세태가 안타깝다”며 “소박하지만 큰 의미가 담겨있는 부친의 그림을 널리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김광수기자 rolling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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