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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아이들/ 해고자 자녀들 '정신적 피폭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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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아이들/ 해고자 자녀들 '정신적 피폭 상태'

입력
2011.06.22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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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놀라요. 혜린이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냐고."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자 김진성(42ㆍ가명)씨 부부는 180도 변해버린 남매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아빠의 파업 이후 딸 혜린(15ㆍ가명)이는 가출을 일삼고, 얌전하던 아들 재민(10ㆍ가명)이는 그림 등을 통해 폭력적 심리상태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늘 중상위권 성적을 유지하고 미술에 특히 소질을 보이던 혜린이는 잇단 가출 끝에 사자성어, 별, 십자가 모양의 문신을 곳곳에 새기기에 이르렀다. 엄마의 장신구까지 훔쳐 집을 나가자 김씨는 지난 3월 큰형님이 사는 제주도에 딸을 맡겼다. 친구들과의 접촉을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여기서도 적응에 실패한 혜린이는 최근 인근 우도의 먼 친척집에 보내졌다. 김씨는 "우도의 학교 선생님도 포기했다고 한다"며 크게 낙담했다.

설상가상으로 아들 재민이의 상황도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해ㆍ달ㆍ별ㆍ꽃 이런 것들을 큼직하게 그리던 애가 이젠 전쟁 그림만 그려요." 김씨가 내민 그림에는 경찰 특공대와 헬기, 총과 탱크 등이 스케치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엄마 나 죽고 싶어"라는 말도 내뱉었다고 한다. 김씨는 "저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아내는 뇌동맥류로 고통 받고 있지만 애들이 잘못될까 더 걱정"이라며 한숨지었다.

쌍용차 노동자 2,000여명의 대량 해고 사태가 있은 지 2년. 해고의 고통이 대물림 되고 있다. 어른조차 PTSD 등을 호소하는 상황에서, 인격 형성단계에 놓인 아이들이 겪는 심적 충격은 더 크고 깊을 수밖에 없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은 대개 30, 40대여서 성장기 자녀들이 많다.

우울증에서 희귀병까지

징계해고자 남인성(41ㆍ가명)씨도 폭력적으로 변한 아들 기윤(13ㆍ가명)이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최근에는 경찰서에 있다는 연락을 받고 가슴이 철렁했다. 남씨의 파업 뒤 소아마비를 앓는 동급생의 목에 문구용 칼을 들이대고, 친구의 팔을 부러뜨려 이미 학교에서 문제아로 찍힌 터였다. 이번에는 자전거 절도였다. 남씨는 "겨우 다섯 살인 막내딸이 쌍용차 공장을 지나며 '아버지 여기서 머리띠 메고 있었는데…'라고 해 섬뜩한 적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한국일보 설문 조사에서 '해고 이후 자녀가 부정적으로 변했다'고 답한 응답자들은 변화 내용(중복응답가능)으로 성격변화(75%ㆍ54명) 학업능력저하(23.6%ㆍ17명) 학교부적응 (23.6%ㆍ17명) 신체적 건강악화(5.6%ㆍ4명) 등을 꼽았다.

심층 인터뷰에서는 우울증 사례가 다수 눈에 띄었다. "말수가 줄었다" "이유 없이 눈물을 흘린다"에서부터 "죽고 싶다고 한다"까지. "초등생 딸이 동생에게 '엄마한테 어린이날인 거 말하지마'라고 했다"와 같이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모습을 걱정하는 답도 많았다.

정리해고자 이모씨의 아들은 틱장애가 왔다. 이씨는 "파업 당시 일곱 살이던 아들이 어린이집에서 '투쟁!'을 외치고 파업 현장을 재현하는가 하면 심하게 눈을 깜빡이고, 자주 이상한 소리를 냈다"며 "최근에도 노조 사무실에 데려갔다가 '정리해고 반대'같은 구호를 기억해내는 것을 보고 아찔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정리해고자 이모씨는 "파업 6개월 뒤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이 뼈가 약해지는 희귀병에 걸렸다"는 충격적인 얘기를 들려줬다. 특별한 직업 없이 복직 투쟁중인 한 노동자는 "쌍용차 노동자 자녀들이 많은 고교에 다니는 우리 아이는 '산 자'(해고를 면한 사람)와 '죽은 자'(해고 노동자)를 운운하는 친구들의 놀림을 힘들어해 전학했다"고 했다.

유년기 충격, 평생 갈 수 있어

전국대학교학생생활상담센터협의회장인 연세대 유영권 교수는 "애들은 파업 현장에서 재난 당한 것만큼의 충격을 받는다"며 "부모의 사회에 대한 분노와 좌절도 그대로 전이돼 무의식 속에 잠재돼 있다가 폭력성이나 우울증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말했다. 유 교수는 "유년기 심적 고통이 평생 사회부적응자를 만들 수 있다"며 "부모는 폭력적 환경에서 아이를 보호하고, 사회는 이들이 타인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도록 집단 심리상담 프로그램을 통해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도 "성장판이 닫히기 전 아이들은 심리적 면역력이 떨어진다"며 "국가폭력으로 인해 빚어진 결과이니만큼 국가적ㆍ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혜경기자 thanks@hk.co.kr

조원일기자 callme1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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