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제 1차 계획은 불행히도 파괴되고 무수한 동지들이 체포되어 처벌되었지만 체포되지 않은 우리 동지들은 도처에 있으니 반드시 강도 왜적을 섬멸하고 최후 목적을 도달할 날이 있을 것이다." 내일 석정(石正) 윤세주(尹世胄ㆍ1901~1942) 열사 탄생 110주년을 맞아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어록비(語錄碑)가 제막된다. 1920년 항일비밀결사조직 의열단 창단 단원으로 '5파괴(破壞) 7가살(可殺)' 특공작전을 위해 서울에 잠입했다가 '제1차 계획' 도중 일경에 체포됐다. 이듬해 법정에서 7년형을 선고 받을 당시의 진술이 어록비에 새겨졌다.
■ 석정은 누구인가. 고향인 경남 밀양에서 1919년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고 만주로 망명했다. 신흥무관학교를 나와 의열단 창립 13인의 일원이 됐다. 출옥 후 다시 망명, 난징(南京)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졸업했다. 후베이(湖北) 지역을 중심으로 민족혁명당, 중앙육군군관학교 등에서 특수훈련 및 정치조직을 담당하다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 창설에 투신했다. 황허 이북을 지배하던 일본과 '국가 차원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조선의용대 정치교관으로 황허를 건넜다. 1942년 5월 28일 태항산 전투에서 적탄에 피격, 6월 3일 순국했다.
■ 중국 역사학자들은 "덩샤오핑(鄧小平)이 평생 세 번 눈물을 흘렸는데 그 가운데 한 번이 윤세주 열사 순국 때였다."고 말한다. 당시 중국은 제2차 국공합작(1937.9~1945.8)으로 일본제국주의에 대해 통일전선을 결성한 시기. 일본군과 대치할 때 정치ㆍ선무 활동에 힘을 기울였던 조선의용대는 팔로군 전투부대와 합동작전을 펴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팔로군 129사단 정치위원이었던 덩샤오핑이 동지였던 석정의 순국에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는 오히려 당연해 보인다. 이러한 정황 등으로 인해 석정은 우리보다 중국에서 더 큰 평가를 받고 있다.
■ 해방 후 경색된 국내 좌우대립은 조선의용대를 조명하려는 노력을 원천 봉쇄했다. 더구나 석정의 선배ㆍ동료로서 그 조직을 창설했고 광복군 부사령관,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김원봉(1898~1958)이 해방 후 월북,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까지 지낸 바 있어 석정의 항일민족혁명 활동은 빛을 보기 어려웠다. 1982년에야 '자주독립과 국가발전의 공로'를 인정 받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 받았다. 김구 선생 중심의 항일독립운동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윤세주 열사의 사상과 활동도 함께 조명돼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한다.
정병진 수석논설위원 bjj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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