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계에서 일하는 초등학교 동창이 있다. 개그맨으로 출발해서 탤런트로 활동을 했다. 주연이 아닌 조연이나 감초 역으로 열심히 하던 친구였다. 한동안 방송에서 얼굴 보기 힘들었다. 방송 속성이 그렇듯 보이면 화제고 보이지 않으면 잊혀진다.
어머니끼리도 갑장 동무여서 외국에 나가서 골프 공부하는 아들 뒷바라지에 고생이 많다는 친구의 소식을 가끔 전해 들었을 뿐이다. 지리산 어느 냇가에서 천렵을 한다는 후배의 전화를 받았는데 대뜸 친구를 바꿔준다. 오랜 만에 듣는 친구의 목소리에서 세월의 무게가 무겁게 묻어 나왔다.
친구도 내 목소리에서 똑같은 세월을 느꼈으리라. 친구는 리포터로 출연하는 방송 촬영하러 지리산에 왔다고 했다. 촬영 중에 반짝 안부를 나누고 다음에 만나자는 약속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다음에 만나자.' 지키지 못할 약속 같은 허언이 귓속에서 이명처럼 윙윙 울렸다. 어린 시절에는 약속이 없어도 늘 붙어살았는데 우리는 세월의 이 편 저 편에서 따로 흘러가는 강물 같다.
초등학교 졸업 30주년 행사장에서 친구를 본 것이 마지막이었으니 강산이 변한다는 세월이 또 훌쩍, 무심히 흘러갔다. 바쁜 척하며 제 즐거운 일만 하며 사는 사람들. 나도 그 족속일 뿐이다. 번쩍, 법정 스님의 에서 읽었던 글귀가 뺨을 쳤다. '사람은 오래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정일근 시인·경남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