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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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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그리스

입력
2011.06.21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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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는 아련한 나라다. 투명하고 따사로운 햇살, 마음을 부풀게 하는 짙푸른 에게해, 작고 하얀 집들 사이의 좁은 골목에 나른하게 풀려 있는 적막(寂寞)한 시간. 그 시간 속을 천천히 유영하는 신(神)들의 이야기를 떠올리다 보면 마치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스인들의 이미지도 그렇다. 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가 남긴 묘비명은 그리스인들의 명상적인 어떤 면을 드러낸다. 시인이자 정치가로 들끓었던 삶의 마침표를 그는 묘비명에 단 세 마디로 찍는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그리스인들의 모습을 담은 우화가 있다. 천신만고 끝에 한몫 잡은 졸부가 에게해변 휴양지에서 피서를 했다. 햇볕에 그을려 찌든 얼굴을 한 늙은 어부를 보고는 혀를 찼다. "원, 찌그러진 깡통처럼 사는구려." 어부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데?" "일할 땐 피땀 흘려 일하더라도, 돈을 많이 벌어 나처럼 이렇게 편히 쉬기도 하면서 살아야지." 어부가 헤, 하고 입을 벌려 웃었다. "이것 봐, 나는 당신처럼 가끔 한 번 쉬자고 피땀 흘려 일할 필요가 없소. 이미 이렇게 날마다 바다에 나가 낚시를 즐기고 있잖소."

■ 하지만 요즘 그리스의 모습은 더 이상 아련한 꿈이 아니다. 거리는 1980년대 서울의 전경들처럼 중무장한 경찰로 봉쇄되어 있고, 젊은이들은 날마다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한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중이다. 오랜 이미지와 너무 달라 오히려 생경하게 느껴질 정도다. 재정위기로 파국을 맞은 정부가 유럽연합(EU)의 구제금융 지원에 맞춰 강력한 긴축 스케줄을 발표하자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2001년 유로존 가입 후 물밀듯이 유입된 저금리의 유로화는 처음엔 축복이었지만, 이젠 재앙이 됐다.

■ 그리스 재정위기나 과거 아시아 외환위기나 위기 전까지 유입된 막대한 양의 저금리 외국 자금이 문제였다. 값싼 돈이 많아지면 '돈 잔치'가 벌어진다. 욕심 없이 잘 살던 늙은 어부까지도 돈을 빌려 양식사업에 뛰어들고, 정부는 정부대로 끝없는 호황을 기대하며 투자니 복지니 하며 예산을 물 쓰듯 한다. 그러다 보면 순식간에 거시지표가 흔들리고, 외국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졸지에 부도공포가 밀어닥치게 된다. 결국 그리스인들을 거리로 몰아낸 원흉은 외국에서 밀려든 값싼 유로화인 셈이다. 그리스마저 '돈 잔치'라는 악몽의 덫에 빠졌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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