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오전 11시쯤 서울 견지동 조계사 인근은 술렁였다. 도심의 고요한 가람이었던 평소와는 달랐다. 대웅전과 앞마당을 메운 신자들이 귀객의 방문을 기다렸다. 검은 정장을 차려 입은 사내들 안내를 받으며 벽안의 남자가 나타나자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다. 남자는 부드러운 미소로 신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영화 ‘귀여운 여인’과 ‘시카고’로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 리처드 기어였다.
배우인 부인 캐리 로웰과 아들 호머를 동반한 기어는 20일 밤 한국을 처음 찾았다. 기어는 7월 24일까지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자신의 사진전 ‘순례의 길’ 행사에 맞춰 방한했다. 그는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를 30여년 동안 스승으로 모셔온 독실한 불교신자다.
한국불교문화사업단장인 지현 스님의 안내를 받으며 대웅전에 들어간 기어는 부처를 향해 삼배를 한 뒤 향을 피웠다. “세계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기어가 이날 서원을 적는 원적부에 남긴 글이다.
기어와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의 만남과 환담이 이어졌다. 기어는 자승 스님에게 꽃다발과 티베트에서 찍은 사진을 선물했고, 스님은 도자기 향로 3개와 템플스테이를 위한 수련복, 염주를 건네며 환대했다. 자승 스님이 “꽃다발은 제가 드려야 하는데”라며 멋쩍어하자 기어는 “이미 많이 받았다. 이리 많은 분들이 맞아줘서 너무 감사하다”고 화답했다. 기어의 부인 로웰은 “놀랍고 아름답다”며 연꽃 모양의 도자기 향로를 보며 탄성을 연이었다. 기어는 염주를 팔에 끼우며 “염주알이 몇 개냐”고 묻는 등 호기심을 나타냈다.
두 사람은 영화와 불교를 소재로 한 대화도 나눴다. 자승 스님이 “불교의 많은 내용이 담겨 있다”며 기어가 주연한 영화 ‘하치이야기’를 입에 올리자, 기어는 “그 영화를 어떻게 아느냐”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기어는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때 감동이 깊어 아기처럼 울었다. 많은 사람들이 (개) 하치가 (세상을 떠난 주인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모습에서 불교의 깨달음 추구를 떠올리는 듯하다”고도 말했다. 그는 “스님들이 선방에서 깨달음을 추구하지만 사실 깨달음은 온전히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며 만만찮은 불교적 소견을 드러냈다.
자승 스님과의 만남에 이어 기어는 경내의 불교중앙박물관에 들렀다. 금동관음보살상을 마주한 그는 “아름답다”고 경탄했고, 11세기 처음 만들어진 대장경 ‘초조본 불설가섭부불반열반경’을 보고선 “정말 처음 만들어진 것이냐”며 감탄사 섞인 질문을 던졌다.
탁본 체험까지 마친 기어는 “선불교를 통해 불교를 처음 접했는데 선불교인 조계종 사찰에 온 것이 우연이 아닌 듯하다”며 한국과의 인연을 강조했다. 그는 “한국 불교가 오랜 전통을 지녔다고 들었다. 오랫동안 힘을 가지고 유지되는 게 중요하다”고도 말했다. 그는 자승 스님 등과 함께 사찰 음식으로 점심을 함께 하고 조계사 방문 일정을 마쳤다.
기어는 23일 오후 사진전 개막 행사와 기자회견에 참석한 뒤 경남 양산시 통도사와 대구 동화사를 찾아 한국 전통 사찰 문화를 체험할 예정이다. 24일엔 서울 인사동과 창덕궁을 돌아보고 25일 출국한다. 사진전엔 기어가 티베트와 인도를 여행하며 찍은 사진 64점, 그와 친분 있는 애니 레보비츠, 헬무트 뉴튼 등 유명 사진 작가 24명이 기증한 사진 24점이 전시된다. 사진 판매 금액은 모두 기어의 국제 자선사업에 쓰인다. (02)525-4237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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