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핏빛의 소나무에 울혈처럼 뭉쳐진 녹색의 솔잎이 어우러진 캔버스에는 스산한 기운이 서려 있다. 마치 그림을 들춰내면 숨은 사연이 튀어나올 듯하다.
거침없는 선과 두터운 붓질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온 화가 강경구(59)의 근작들을 선보이는 '먼그림자-산성일기'전이 다음달 15일까지 서울 안국동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경원대 교수인 작가가 학교 근처에 있는 남한산성을 소재로 삼아 펼친 것이다. 병자호란(1636년) 때 산성을 배경으로 벌어졌던 역사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어냈다. 목탄 드로잉 10여점을 비롯해 회화 26점이 나왔다.
이번 전시에서 단연 주목할 만한 것은 붉은 소나무 시리즈다. 원근법이 무시된 채 검붉은색을 띤 소나무는 암울했던 역사를 재해석한 결과물이다. 강씨는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청 태종에게 굴욕적으로 무릎을 꿇었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스러진 아픈 역사의 현장"이라며 "이곳을 떠도는 역사의 영혼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거칠고 불규칙한 붓질로 아픈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고자 했다"고 말했다.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그려진 인간형상은 기괴하다. 밧줄에 묶인 벌거벗은 사람들과 마치 부처처럼 가부좌를 틀고서 잘린 머리를 들고 있는 인간. 그는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삼학사(三學士ㆍ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지조를 표현했다. 남한산성은 이들의 지조와 충절, 애국정신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곳이다"고 했다.
목탄 드로잉들도 한결같이 무겁다. 작가가 정육면체의 작은 입체조각들을 이어 그린 것은 역사를 켜켜이 쌓은 남한산성을 의미한다. 그 위로 설전을 벌이는 인간, 인간 그림자와 뒤 돌아보는 작가, 목 매달린 얼굴 등에서 작가의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사색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02)736-4371
강지원기자 styl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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