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점 생존권 vs 시민 보행권, 멱살잡은 도심 거리
"가난한 사람들의 최후 생계수단이 노점상입니다. 불법인줄 잘 알지만 그래도 무조건 쫓아내려고 하면 우리보고 이대로 길거리에서 굶어 죽으라는 겁니까."
지난 13일 전국노점상대회가 열린 서울역광장.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노점상인 5,000여명은 '노점탄압 반대! 생계형 노점상 인정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2시간 넘게 시위를 벌였다. 1988년 6월13일 노점상인의 권리 투쟁을 위해 전국노점상연합회가 결성된 이래로 벌써 24번째, 노점상인들은 1년에 한번씩 모여 집회를 이어오고 있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선릉역 근처에서 10년째 분식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최모(47)씨는 "6ㆍ13은 노점상인들 모두의 생일"이라며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용역 직원들 때문에 늘 가슴 졸이며 살아왔는데 오늘만큼은 우리의 목소리를 마음껏 분출하고 싶다"고 울분을 토했다.
최씨가 기자를 붙잡고 한참을 늘어놓은 요구사항은 단 한가지. 무자비한 단속을 중단해달라는 것이다. 노점상 자체가 불법 아니냐고 묻자, 최씨는 불법인줄 알지만 당장의 생계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항변했다.
생존과 불법, 팽팽한 줄다리기
시민들이 오가는 거리 한쪽을 무단으로 점유한 채 좌판이나 손수레를 세우고 물건이나 음식물을 팔며 생계를 이어가는 노점상의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생존권을 지켜달라는 상인들의 요구와 도로 점용은 명백한 불법으로 시민들의 보행권이 우선 보장돼야 한다는 일선 지방자치단체의 원칙도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는 상황.
서울시는 노점상 문제 해결을 위해 2007년부터 노점밀집지역에 대해 특화거리 조성사업을 펼쳐왔다. 단속 일변도의 정책에서 벗어나 체계적으로 노점상을 '관리'하겠다는 발상이다. 노점상 단속은 풍선효과가 심해 단속의 효과가 크지 않다는 현실적 한계도 반영됐다.
특화거리로 지정되면 우선 시민들 통행이 잦은 간선도로변 노점을 떠나 이면도로(뒷길) 안으로 옮겨야 한다. 또 시가 정해준 규격화(가로 2m×세로 1.5m)된 노점판매대를 구입하고 시간제 운영이 끝나면 판매대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서울시 관계자는 "근본적으로 노점이 불법이라는 원칙은 여전히 변함없지만 갈등이 심해지다 보니 일단 줄여나가는 쪽으로 유도하고 있다"며 "특화거리 사업은 보행환경 개선과 경관을 보기 좋게 만드는 동시에 이면거리 상권도 활성화할 수 있어 일석이조"라는 입장을 밝혔다.
특화거리 사업? 노점 말살대책
그러나 노점상들은 특화거리 사업이 일방적인 노점 말살정책이라고 입을 모았다. 조두희 노점노동연대 위원장은 "사람들 없는 곳으로 옮겨가서 장사를 하라고 하는데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냐. 서울시의 특화거리 사업은 궁극적으로 노점상을 말살하려는 술책에 불과하다"고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노점상인들이 가장 염려하는 부분은 바로 수익. 먼저 이면도로로 옮겨간 상인들마다 장사가 안 된다고 아우성이기 때문이다. 2009년 종로2가 대로변에서 관철동 피아노거리로 옮겨간 김모(49)씨는 "입구 쪽은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뒤편은 정말 개시도 못할 때가 있다"고 하소연했다.
김근기 종로노점상연합회 부회장은 "다른 종로 노점상들이 이전할 때 시와 구청에서 홍보대책을 약속했지만 결국 헛공약에 그쳤다"면서 "창덕궁 쪽으로 이전한 노점상 150명 중 지금 장사를 이어가는 사람은 20명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제도화된 소통으로 타협점 모색해야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서울 인사동 거리는 지난 3월부터 기존 자리를 사수하려는 노점상인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용역업체 직원들간의 충돌로 몸살을 앓고 있다. 종로구는 2009년부터 '걷기 편한 거리 사업'의 일환으로 인사동과 대학로 등의 노점을 이면도로로 이전하는 작업을 추진 중이다.
구광일 종로구노점상연합회 지부장은 "우리도 몇 군데를 선정해 이전하겠다고 협의안을 내놨지만 구청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왜 우리의 의견은 들어보지도 않고 무시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시는 특화거리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노점상인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설득하는 작업을 거치긴 하지만 의무사항으로 제도화돼 있지는 않다고 밝혔다. 서울시 도로행정과 가로환경개선팀 이두영 대리는 "지자체는 보통 노점상인들의 대표인 지역장을 중심으로 대화를 하다 보니 노점상 개개인의 의견을 모두 반영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며 "이번 인사동 갈등을 보면서 소통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앞으로 이 부분을 제도화하는 장치를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남진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노점상이 불법이라고 해서 무조건 없애야 한다는 정책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생계형 노점상과 기업형 노점상을 구분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며 "생계형 노점상은 등록제를 통해 관리를 하고 기업형 노점상은 단속하는 한?이들이 향후 다른 직업군으로 옮겨갈 수 있도록 장기적인 직업교육도 병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뉴욕 홍콩 등 세계 어느 도시나 가난한 자가 살고 노점상도 많다. 오로지 도시 미관이랑 시민들 보행권을 위해서 생계를 위해 나온 서민을 몰아내는 일은 없어야 한다"며 "서로 대화를 통해 상생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일 때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윤주기자 kkang@hk.co.kr
■ MB 인연 인사동 풀빵장수 "청와대에 해결 기대 접어"
"오늘은 용역들이 더 많이 나온 것 같아요. 가방은 한쪽으로 모아두고 신발이 벗겨지면 다칠지 모르니 운동화 끈 단단히 동여매세요."
16일 오후 1시 서울 종로구 인사동 노점상들의 손수레 보관소. 40여명의 상인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집결해 있었다. 당장 하루 벌어 먹고 사는 처지, 대부분이 50, 60대인 상인들은 생계 유지를 위해선 손수레를 끌고 장사에 나서야 하지만 몸집 좋은 용역업체 직원 40여명이 앞을 가로막는 상황에서 선뜻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눈치다.
"집에 가다가도 (용역 조끼와 비슷한) 노란색 옷 입은 사람들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요. 사실 지금도 너무 무서워요. 왜 이런 험한 꼴을 당해야 하는지 먹고 사는 게 참 힘드네요." 인사동에서 5년째 액세서리를 판매하는 한모(49ㆍ여)씨는 이제는 싸우는 것도 지겹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종로구와 인사동 노점상인들간의 철거 갈등이 3개월째 이어지면서 상인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시각장애1급에 근육암을 앓고 있는 이영석(61)씨는 "병마보다 용역들이 무자비하게 폭력을 써서 손수레를 빼앗아가는 것이 더 무섭다"며 "당장 뒷골목으로 밀려나면 치료비 마련조차 힘겨운 상황"이라며 울먹였다. 이씨에게 '생존권 사수'는 단순한 구호에 그치지 않아 보였다.
이날 현장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2006년 서울시장 퇴임 후 인사동에 들러 '일일 풀빵 장수'를 자청했던 인연으로 유명해진 청각장애인 풀빵 노점상 손병철(53)씨도 나와 있었다. 그는 지난 4월 종로구의 인사동 노점 단속이 생존권을 위협한다는 호소문을 청와대에 보내기도 했었다.
손씨의 손수레는 며칠 전 용역직원들에 의해 빼앗겨 철거된 상태. 그는 당분간 장사를 접기로 했다. 손씨는 인터뷰를 한사코 거부했지만 이명박 대통령에게 실망했다는 의사를 분명히 드러냈다. 그는 수화통역사를 통해 "편지를 보낸 후 잘 해결될 거라 기대했지만 이미 청와대와 종로구 사이에 논의가 오간 상황 아니냐"며 "이제는 정말 지친다. 추가로 호소문을 더 보낼 계획은 없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인사동에서 공예품을 판매하는 한 상인은 "우리는 수백만원의 임대료를 내는데 노점상인들은 한 푼도 안내고 장사하는 것을 보면 화가 날 때도 있지만 인적이 거의 드문 쪽으로 이전을 강요하는 종로구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라고 노점상인들을 두둔했다.
그는 또 "사람들이 다니는 장소로 노점상 문화특구를 개발하면 외국인들이 찾는 관광명소도 될 수 있지 않냐"며 "같은 서민 입장에서 노점상인들의 문제가 남의 일 같지 않아 응원하는 주변 상인들도 많다"고 인사동 분위기를 전했다.
강윤주기자 kk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