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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호미곶의 해돋이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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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호미곶의 해돋이를 기다리며

입력
2011.06.17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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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이 보고 싶어졌다. 우리 땅의 동쪽 끝 호미곶에 갔다. 중국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 형상을 한 반도의 꼬리 부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이라 해서 그 뜻을 상징하는 조각상과 기념관, 박물관이 규모 있게 자리잡고 있다. 이국적인 모습의 등대 때문일까. 시골스럽다기보다는 약간 외국에 와 있는 듯한 느낌으로 이곳 저곳을 거닐며 상념에 날 맡겨 본다.

여행은 살고 있는 생활과 환경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바깥에서 자신을 돌이켜 보게 한다는 점에서 훌륭한 정신 수양의 방법이다. 요즘은 무슨 갈증이 깊어서인지 틈만 나면 참았던 고무줄이 퉁겨 나가듯 내 몸은 성지나 역사박물관을 향한다. 갈증이 깊어진 이유는 내 인생에 주어진 소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어두움 때문이다.

그 동안은 복이 많아서 대다수의 사람들을 괴롭히는 고민에서 피해갈 수 있었다. 할 일이 너무나도 선명해서 다른 사람의 일을 부러워한 적도 없고 내 일에 불만을 가진 적도 없으며 재능에 모자람을 느끼지도 않았으니, 하늘이 내린 축복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근데 나이 오십이 되어 다시 고민의 원점에 서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몇 달 전이다. 불쾌하고 억울한 감정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다. 나와 남이 다르지 않고 다 똑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니만 그 생각이 힘든 감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동안 내가 남과 다르다는 교만함에 빠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어떤 사람이 옳다고 하는 것, 또 그르다고 하는 것, 그 중 내가 어느 편에 서 있건 모두 다른 것 같지만 결국 다르지 않다. 이해관계의 이편과 저편에서 입장이 다른 걸로 옳으니 그르니 논리를 세우면서 다름을 찾는 일에 진짜 다름은 없다.

황희 정승의 일화가 다시 떠오른다. 다투던 하인들이 시비를 가려 달라 청하자 황희는 두 사람 모두 맞다고 대답했다. 부인이 그 대답이 틀렸다고 따지자 “당신 말도 맞구려”라고 응수한다. 시비를 다투는 일은 그 입장과 의견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아닐까. 그러면 진짜 다름은 어디에 있는 걸까. 그 동안 다름을 주장하고, 다름에서 의미를 찾아왔던 모든 생각들 속에 진짜는 없다. 진짜 다름은 그 바깥으로 나와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다.

그러고 나니 사회 생활에서 한 발짝 앞으로 가는 일이 두렵고 조심스럽다. 앞뒤 재지 않고 성큼성큼 앞만 향해 가던 용기와 배짱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나이 오십의 정약용이 고향에 돌아가 “겨울 시내를 건너듯 신중하고, 사방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는 뜻으로 여유당(與猶堂))이라는 호를 자신에게 주었을 때의 심정이 이런 것이었을까. 악보 한 줄, 글 한 줄이 참 어렵다.

호미곶에는 뱃길을 밝혀주는 등대가 있어 등대 전문 박물관이 있다. 등대에 불을 밝혀 놓는 사람들의 고단한 일생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빛으로 뱃길을 알려주듯 인생의 길을 밝혀 준 나의 철학과 은사님들에 대한 존경심으로 가슴이 물들기 시작한다. 이미 돌아가시기도 했고 나의 선생님은 은퇴하고 칠순을 훌쩍 넘기셨다. 전에는 나도 그 나이가 되면 그런 덕을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젊음이 주는 여유로 비판도 하였지만, 그분들이 이룬 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체가 있는 정신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그 맥이 흘러 그분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고 전해져야 한다.

동이 트기 시작한다. 어둠이 걷히고 빛에 사물들을 보이기 시작한다. 빛이란 참으로 고마운 존재이다. 빛이 없다면 아무것도 볼 수가 없으니 말이다.

조성우 영화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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