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흔한 휴대폰 로밍 서비스가 안 된다. 간혹 보이는 인터넷 카페에선 속도가 너무 느려서 사진 파일 한 장 받기도 힘들다. 널찍한 도로엔 인근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란한 오토바이 행렬도 보이지 않는다. 연식이 오래 되어 보이는 버스와 중고 트럭 승합차를 개조한 마을버스만이 여유로운 표정의 시민들을 빼곡히 싣고 달리고 있었다.
간혹 무단횡단을 하거나 중앙선을 따라 걷는 현지인들이 느릿느릿 달리는 차량들과 묘한 조화를 이뤘다. 몇 시간을 달려도 자동차 경적소리를 들을 수 없었고, 사람 많은 시장에서 조차 고성이 오가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미얀마를 대표하는 도시 양곤의 첫인상은 이렇게 시간이 멈춘 듯 했다.
반세기 동안 이어져 온 군부의 폐쇄정책이 변화의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찬란한 불교 유산,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자랑하는 미얀마가 여행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있다. 양곤은 인구 500만의 미얀마 최대 도시다. 2005년 미얀마 군부가 네피도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미얀마의 수도는 양곤이었다. 고대 불교 유적지로 이름난 바간, 거대한 하늘 밑 인레 호수, 종교와 문화의 중심지 만들레이 등을 잇는 미얀마 교통의 중심지로 전세계 여행객들이 몰리고 있다.
고층건물에서 바라본 양곤의 모습은 ‘정원의 도시’라는 애칭에 걸맞게 온통 푸른빛이다. 2008년의 무서운 태풍 나르기스에 절반에 가까운 나무들이 뽑혀 나갔지만 어머니와도 같은 숲은 여전히 도시를 포근히 감싸고 있다.
이른 아침 양곤에서 가장 넓은 인야 호수로 산책을 나섰다. 처음 마주친 청년은 축구 유니폼을 입었는데 돌아보니 등에 웨인 루니 이름이 새겨져 있다. 건너편 길가엔 미얀마 축구리그 일정을 알리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물웅덩이가 파인 공터에서 아이들과 승려들이 뒤엉켜 축구를 즐기는 모습이 심심찮게 보였다. 과거 아시아 축구의 맹주로 이름을 날린 미얀마의 축구 열기는 여전했다.
이제 아침인데 벌써부터 거리가 후끈 달아 오른다. 서둘러 발길을 재촉한 곳은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 전통시장이다. 독립 영웅의 이름을 딴 보족 아웅산 시장엔 보석, 귀금속, 의류, 잡화 매장이 즐비했다. 서울의 남대문시장과 닮은 점과 다른 점을 가리던 중 어느 모퉁이에서 낯익은 얼굴들을 만났다. 불법복제 DVD를 파는 좌판 위엔 온통 한국 배우들 얼굴로 가득했다. 그 중엔 며칠 전 한국에서 처음 방송된 따끈따끈한 드라마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얀마 국영TV는 이미 한국 드라마가 점령했고, 최근의 방송분은 인터넷이 발달한 인근 태국에서 다시 보기 서비스를 이용해 다운받아 육로를 통해 미얀마로 전달하면 한국어 전문가들이 자막을 입혀 판매한다고 한다.
후끈한 한 낮의 열기에 지칠 무렵 쉬엄쉬엄 미얀마 사람들의 일상을 체험하고 싶다면 양곤 순환열차를 이용해 보자. 서울의 지하철 2호선처럼 양곤 시내를 한 바퀴 도는 순환열차는 모두 38개 역을 2시간 30분 동안 운행한다. 유적, 관광지 코스와 연계는 어렵지만 도심과 외곽을 지나며 역 주변 시장 풍경 등 볼거리가 푸짐하다. 시장에 내다 팔 청과물을 열차 객실에 가득 펼쳐 놓은 채 다듬고 꾸리는 중년의 부부,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이들. 어수선해 보이지만 결코 큰 목소리로 떠들거나 서두르지 않는다.
덜컹덜컹 열차에 몸을 실은 채 한참을 달려 양곤 중앙역에서 내렸다. 흔히들 쿠바를 ‘중고차의 전시장’이라고 일컫는데 미얀마도 그에 견줄 만 했다. 정부의 승용차 수입 규제로 차량 가격이 치솟아 시내를 달리는 대부분의 차량은 일본이나 한국서 수입된 중고차량이 많다. 군용차량을 개조한 반세기가 넘는 연식을 자랑하는 버스, 역사 속으로 사라진 대우 엠블럼을 단 티코 택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해질 무렵 방문한 쉐다곤 파고다는 양곤 여행의 백미였다. 쉐다곤 파고다는 산이 없는 양곤 중심부에 언덕을 쌓고 그 위에 높이 100m에 이르는 탑을 세워 멀리서도 잘 보이게 만든 곳이다. 하지만 울창한 숲에 가려 금빛 상단부만 보인다. 미얀마의 상징이자 자존심으로 1988년 민주화 운동 당시 승려들이 이끄는 반정부 가두행진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샌들을 벗고 파고다에 오르는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창 밖엔 벌써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대리석 바닥 위로 걸음을 재촉하자 발바닥서 울리는 충격이 머리까지 전해온다. 마침내 경내에 들어서는 순간 인간이 세운 장엄한 건축물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수 십 톤의 황금과 보석으로 단장한 불탑은 황금빛 조명을 받아 낮에 멀리서 바라본 것과는 전혀 다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경내를 한 바퀴 돌고 나서야 황금에 눈이 먼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제단에 꽃을 올리는 신자, 정성 들여 성수를 끼얹는 어린 승려, 끊임없이 독경하는 노인, 단아하게 앉아 두 손을 모은 여인들.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기도에 열중하고 있는 참배객들 옆에서 정신 없이 눌러대던 카메라 셔터를 멈췄다. 그 모습들이 너무나 경건해서 불교신자가 아닌 이방인도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깊어가는 양곤의 밤, 물질적 가치보다 정신적 풍요로움의 가치를 추구하는 미얀마 사람들의 얼굴에서 부처의 미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양곤(미얀마)=글ㆍ사진 김남필기자 wow@hk.co.kr
■ 타나카나무로 만든 천연화장품 발라 보세요
2008년 늦봄은 미얀마에 시련의 계절이었다. 태풍 ‘나르기스’ 가 14만명의 인명 피해를 남겼고 수백만명의 이재민에게 고통을 안겼다. 당시 외신을 통해 본 이재민들의 얼굴에서 절망감과 함께 생존을 향한 강한 의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뺨과 이마에 진흙빛의 무엇인가를 바르고 있던 모습이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특히 여성과 아이들이 얼굴에 바른 노란색 화장품의 정체는 무엇일까.
토막 낸 타나카 나무를 동그란 숫돌 위에 놓고 물과 함께 갈면 걸쭉한 노란색 액체가 만들어 진다. 미얀마인들은 보통 뺨과 이마에 정사각형 모양으로 타나카 액체를 발라 자외선을 차단하고 피부 트러블을 막는다. 훌륭한 천연화장품 타나카를 바른 미얀마 여성들은 유독 고운 피부를 자랑하며 꽃잎 등 다양한 문양으로 개성을 표출하기도 한다.
김남필기자 wow@hk.co.kr
■ 여행수첩/ 미얀마
미얀마로 가는 직항 노선은 아직 없다. 인접한 베트남, 태국 등을 거쳐야 하는데 베트남 항공(www.vietnamairlines.co.kr)에서 베트남 호치민~미얀마 양곤 노선을 주 2회, 베트남 하노이~미얀마 양곤 노선을 주 5회 운항하고 있다.
미얀마 화폐 단위는 짯(Kyat). 미얀마에서는 현금자동인출기(ATM) 이용이 불가능하므로 달러를 넉넉히 준비해서 현지에서 환전을 해야 한다. 1993년 이후 공식적으로 고정환율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실제 시장 환율과 차이가 커 금은방, 보석상, 거리의 호객꾼을 통한 암시장이 공공연히 존재한다. 호텔이나 교민들이 운영하는 한국식당에서 환전하는 것이 안전하고, 지방에선 환율이 더 낮기 때문에 양곤에서 넉넉히 환전해 가는 것이 유리하다.
현지시간은 한국보다 2시간 30분 늦다. 슬리퍼나 샌들이 편리하다. 여성들은 얇은 카디건을 꼭 챙기자. 강렬한 햇빛을 가려주고 사원 출입 땐 치마 대용으로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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