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영업창구에 가면 늘 들꽃 같은 풋풋한 활기가 감돌았다. 1997년 말부터 겪은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이전 얘기다. 손이 재고 영민한 고졸 여행원들이 발산하는 앳되고 싱그러운 에너지가 삭막한 은행에 환한 봄기운을 가져다 놓았던 것이다. 여행원들을 무슨 화초 따위로 여기는 거냐고 따진다면 죄송할 뿐이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 때에 비해 요즘 은행 창구는 무척 고급스럽고 세련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창구 여행원들도 대부분 대졸자로 대체됐다. 검정색 수트 차림인 그들의 분위기 역시 왠지 도도한 느낌이 드는 비즈니스 스타일로 바뀌었다.
■ 여상을 갓 졸업한 하이틴으로 채워지던 은행 창구의 여행원들이 대졸자로 본격 대체된 건 IMF체제 때다. 취업난이 극심했고, 여성 대졸자는 넘쳐났다. 은행으로선 같은 값이면 대졸자, 했던 것이 정부의 대졸자 취업 장려정책과 맞물려 아예 입사 자격을 대졸자로 사실상 제한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다. 그 결과 한 시중은행에선 1970년대 93%에 이르던 고졸자 입사비율이 2000년 이후엔 2%로 급감했다고 한다. 특기할 만한 점은 은행 등이 대졸자만 뽑자, 전문계고(옛 상고나 공고) 졸업생들의 대학 진학률은 2001년 40.8%에서 2010년 71%로 치솟았다는 사실이다.
■ 이는 과거라면 여상에서 은행으로 직행할 수 있었던 사람이 실질적인 취업제한 때문에라도 대학으로 향할 수밖에 없게 된 현실을 반영한다. 문제는 대학 전공지식이라는 게 은행 창구업무에서는 거의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파생상품 판매나 방카슈랑스 같은 새로운 업무가 등장했다고는 하나, 똘똘한 고졸 여행원이라면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는 게 은행 관계자들의 얘기다. 사실 고졸이라도 자질만 훌륭하면 어떤 금융업무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 선린상고 출신으로 신한금융 발전의 신화를 이끈 라응찬 전 회장은 여실히 보여줬다.
■ 학력 인플레이션이 우리 사회의 고질이 된 지 오래다. 은행 창구는 물론이고 심지어 구청 환경미화원 모집에도 대졸자들이 몰린다는 얘기도 이미 구문(舊聞)이다. 비합리적인 학력차별이 청년들에게 4년이라는 시간과 1인당 수천 만원에 달하는 등록금의 낭비를 초래하게 한 것이다. 최근 IBK기업은행이 IMF 체제 이후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전문계고교 출신 여행원 20명을 채용했다는 소식이다. 학력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잘못된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유쾌한 결정이다. 고졸 여행원들의 야무진 성공을 기대한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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