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ㆍ19 뒤의 정치ㆍ사회적 격동에 따른 시대적 기류는 어김없이 문단 쪽으로도 흘러 들어 그 해 1960년 6월에는 기왕에 자유당 정권과 밀착해 있던 '문총'도 해체되고, 새로 과도적인 임시기구로 '문화단체협의회'라는 것이 발족된 것 외에는 문단 중심부로까지는 아무런 기별도 닿지 않았다. 말하자면 아직은 깊은 잠에서 깰둥말둥이었다.
그러나 조금만 시야를 넓혀서 본다면 사회대중당(김달호), 혁신당(장건상), 통일사회당(서상일, 이동화, 윤길중),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등이 결성되고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이 장면 총리에게 미국 소련을 차례로 방문하라며 압력을 가하고 남북학생회담을 성사시키라는 둥 우리 사회 일각은 급격하게 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해 60년 말에는 서울시ㆍ도의원 선거, 시ㆍ읍 ㆍ면의원 선거, 서울시장ㆍ도지사 선거 등 지방자치제에 따른 민주화도 괄목하게 진척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상계'사도 이러한 세상 변화에 따라 바빠지기 시작, 장준하는 아예 잡지 운영을 부완혁에게 맡기고 국토건설본부장으로 옮겨 앉아 본때 있게 경륜을 펴볼 의욕에 불탄다. 하지만 그이의 그 경륜이라는 것도, 막혔던 봇물 터지듯이 '혁신계'가 대거 떠오르면서 몇 년 동안 독야청청 했던 그 '사상계'도 어느새 스름스름 색이 바래어져 가고 있었다.
흥사단도 장리욱 김재순이 주축이 되어 월간 종합지로 '새벽'지를 창간하고 '신태양'도 그럭저럭 건재했다. 이 잡지에서는 조금 엉뚱하게도 양주동과 이숭녕 사이에 국학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논쟁은 4ㆍ19 한 달 전인 그 해 3월에 조선일보를 통해 시작됐는데, 그동안 6ㆍ25 전란으로 좌우 격돌이 거의 자취를 감추어버린 무풍지대인 학계에서 혼자서만 이리저리 날뛰며 자칭 '국보' '천재' 운운까지 하던 양주동에게도 그런 식으로 제동이 걸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세상 변해가는 양상에는 좌우 이념이라는 것보다 더 깊은 일종의 흐름, 세(勢), 추세라는 것이 있어 보인다. 4ㆍ19를 전후해서 문화 양상으로 터져 나온 이런 일련의 움직임 하나하나에도 그 어떤 일관된 이 시대 나름의 기맥(氣脈) 같은 것이 있어 보인다.
그 무렵 나로서 특기할만한 것은 두 번에 걸쳐 판문점 남북 회담에 취재기자의 일원으로 다녀온 일이었다. 첫 번째는 1960년 9월에 다녀와 단편소설 '판문점'을 써서 이듬해 사상계 3월호에 발표하였고, 두 번째는 1961년 5월초 5ㆍ16이 일어나기 바로 1주일쯤 전이었다. 그러니까 그 해 5월 13일자로 민자통 주최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통일궐기대회가 막 열리기로 예정되어 온통 시끌시끌하던 때였다. 마침 그 며칠 전 납치어부 송환문제로 남북 당국 간에 판문점에서 회담이 열려 그 취재 기자들을 관장했던 공보처 보도과 최규정의 권고와 알선으로 나는 모모 통신사 기자 자격까지 얻어냈다.
이렇게 모처럼 판문점엘 가는 길에 현지 형편을 보아 북의 가족들에게 내가 이 남쪽에 살아 있다는 소식이라도 전할 길이 없겠는지 싶은 나대로의 꿍꿍이 속이 당연히 없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 속셈은 현지에 닿자 기대 이상으로 이뤄졌다.
나는 그 '판문점' 소설 속에서 나온 대로, 북쪽의 젊은 여기자 하나를 만나 몇 마디 토론을 하던 중에 실은 당시 북쪽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 모모가 이종사촌 형님이고 노동당 국제부장 모모는 외육촌 형님이라고 하자, 그 여기자는 대뜸 두 눈이 휘둥그래졌고 그 직후에 그 쪽 군관 하나가 나타나 내 사진을 잘칵잘칵 몇 장이나 찍어댔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기분나쁘지는 않았다. 나쁘기는커녕, 이제 내가 이렇게 남쪽에 살아 있다는 것이 어떤 식으로든 북쪽 가족도 알아지겠거니 하고 흐뭇하기까지 했다. 특히 그 이종 사촌형님은 어릴 적부터 나를 유별나게 예뻐해 주었던 터여서, 응당 큰 이모에게 내 소식을 발설할 것이고 큰 이모님도 나를 극진히 아끼고 있었으니 은밀하게 어머니에게 알릴 것이 아닌가.
그러고 나서 그 소설이 사상계 3월호에 나온 뒤 두 달쯤 지나 5월 초에 나는 다시 최규정의 연락을 받고 두 번째로 판문점엘 갔다.
북한 기자들 면면은 저번 때와 대동소이 했는데, 특히 해방 전에 이화여전을 나왔다던 서글서글하게 마음씨 좋게 생겼고 입심도 걸던 아주머니 기자는 나를 보자 와락 반색을 하며 슬쩍 한마디 속삭였다.
"소설 읽었시오. 근데, 그런 건 써설라무니, 그 기자, 이젠,"
"녜? 그럼, 그 기자, 저 때문에 …."
"아니, 일 없이요. 단지, 다른 부서로 옮겼을 뿐이니까"
하고 그녀도 우물쭈물 넘겼고 우리는 곁의 나무 벤치에 나란히 앉아 같이 사진도 찍으며 그녀의 손거울 하나와 손수건, 그리고 수첩 하나만 달랑 들어 있는 핸드백 속까지 열어보며 ご?우스개 소리를 한마디 하기도 했었다.
"여자 손가방이 어쩌다 이래요. 화장품 하나 없고. 허긴, 원체 혁명사업에만 바쁘다 보니까 이렇긴 하겠소만"
그녀도 대답은 없이 오지랖 넓게 히죽히죽 웃기만 했으나, 마치 시동생이라도 대하듯이 나에게 유난히 호감을 보이며 소련 이즈베스챠 지 특파원에게까지 나를 소개하며, 나더러 정식 인터뷰에 응할 수 없겠느냐고 하여 나는 무척 아쉽게 느끼면서 완곡히 사양을 하였다. 이건 그 후일담이지만, 그 때 그런 일을 알선했던 서울대 정치과를 나온 그 강릉사람 최규정은, 1960년대 말에 급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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