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각종 규제의 폐단을 지적하며 대불공단 전봇대를 언급했다. 입주업체들의 각종 민원에도 5년동안 꿈쩍하지 않던 대불공단 전봇대 2개가 불과 이틀 만에 제거됐다. 이후 '전봇대'는 탁상행정의 표본이 됐고, '규제 완화'는 이명박 정부의 핵심 아젠다로 자리잡았다. 규제 완화의 성과는 화려했다. 국무총리실 규제개혁실은 2009~2010년 총 2,000건의 규제를 정비했다. 중소기업 옴부즈만실은 2009년 7월 이후 1,989건의 규제애로 사항을 접수, 올해 5월까지 이 중 1,655건을 해결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표방한 이명박 정부는 재벌에 대한 규제도 마구 풀었다. 문어발식 확장을 규제하던 출자총액제한제도가 대표적이다. 중소기업계는 규제 완화가 재벌의 중소기업 땅 뺏기로 귀결돼 시장독재로 흐를 것을 우려했지만, 규제를 시장경제의 적으로 보는 MB정부에겐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재벌 계열사 5년 새 50% 급증
이후 대기업들은 부동산 IT 유통 물류 엔터테인먼트 광고 등 무차별적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했다. 10대 그룹 계열사는 2005년 350개에서 작년 말 538개로 치솟았다. 이 중 상당수는 일감 몰아주기를 통한 편법 상속을 위해 설립된 비상장 계열사들이다. 최근 중소기업들이 대기업 참여 제한을 신청한 230개 중소기업 적합품목 중 삼성과 LG그룹이 각각 34개로 가장 많이 진출해 있었다.
대기업 최고경영자(CEO) 출신 대통령이 '친기업 정부'를 외치는 상황에서, 납품단가 후려치기 등 불공정 행위에 대한 단속이 제대로 이뤄질 리 없었다. 대기업 계열사가 중소기업으로 위장해 중소기업 공공구매 시장에 참여하거나 하청 중소기업의 기술과 인력을 빼앗아가도 솜방망이 처벌뿐이었다. 중소기업과 서민들의 삶은 갈수록 힘들어지고 재벌의 배만 살찌우는 양극화 심화는 '규제 완화 만능주의'가 낳은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정부가 동반성장을 외치며 다시 규제의 칼을 빼 들었다. 중소기업 사업영역 보호와 대형 유통업체의 골목상권 진입 규제, 재계약이나 신규 계약 때 전ㆍ월세를 5% 이상 올리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전ㆍ월세 상한제 등이 대표적인 상생 정책이다. 그런데 기득권층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이명박 정부의 최근 경제이념이 반시장적이고 포퓰리즘이며 중도좌파에 가깝다고 몰아붙인다. 대기업의 사업영역을 조정하려는 것은 사유재산권과 직업 선택의 자유를 제한해 헌법에 위배된다는 주장도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법은 재산권의 내용과 한계를 법률로 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해야'하며(헌법 제23조),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제119조)고 돼 있다.
합리적 규제로 시장독재 막아야
시장주의자들에게 규제는 무조건 나쁜 놈이다. 가격을 왜곡하고 경쟁력을 떨어뜨리므로 제거해야 마땅한 존재다. 물론 규제는 한번 만들어 놓으면 없애기가 쉽지 않고, 유지하는 데 상당한 비용이 들어간다. 불합리한 규제를 없애면 기업경영 환경이 개선되고 성장잠재력 확충에도 도움이 된다. 당연히 불합리한 규제는 없애야 한다. 그런데 시장 질서를 위해 꼭 필요한 규제도 있다. 바로 강자들의 특혜와 반칙을 막기 위한 합리적인 규제다.
이 대통령은 그제 라디오연설에서 "소득이 높고 불공정한 사회보다는 소득이 다소 낮더라도 공정한 사회에서 사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이라고 했다. 반칙과 불공정 게임으로 부를 독식하는 소수 기득권층을 제외하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강자의 반칙과 특혜를 규제해 부의 집중을 막는 것은 헌법 정신에도 부합한다. 공정사회는 재벌에 대한 팔 비틀기나 구호로는 이뤄지지 않는다. 합리적인 규제를 통해 공정한 경쟁의 룰을 만들어야 한다.
고재학 논설위원 goind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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