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권이든 돌이켜보면 적어도 하나 정도는 떠오르는 키워드가 있다. 민간정부만 놓고 볼 때, 우선 김영삼 정부하면 '과거청산'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외환위기를 초래한 오점은 씻을 수 없지만, 30년 군인통치시대가 남겨 놓은 두터운 인맥과 문화를 과감히 파괴했고 금융ㆍ부동산 실명제를 통해 경제정의의 가장 중요한 틀을 만들었다는 점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키워드가 없어 보이는 MB정부
김대중 정부하면 역시 '남북 정상회담'과 '구조조정'이다. 햇볕정책 자체가 논란거리이지만, 우리나라 분단사에서 이때가 가장 평화로웠던 시기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또 그때 가혹한 구조조정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나라 대기업의 글로벌 경쟁력도, 한국경제의 위기 복원력도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노무현 정부는 '반(反)부패'다. 일부 측근들의 부정으로 좀 얼룩은 졌지만, 사회가 과거보다 확실히 투명해지고 깨끗해졌다는 점엔 이견이 없다. 그의 좌파성과 반골기질을 싫어했던 기업인들조차 "처음으로 정치자금 같은 것 때문에 시달리지 않아서 좋았다"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에게선 어떤 키워드가 연상될까. 나만 그런지는 몰라도, 솔직히 이거다 하고 떠오르는 단어가 없다. 아직 임기 중이라 평가 자체가 이른 감은 있지만, 그래도 이맘때면 MB정부를 상징할 아이콘 한두 개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지.
사실 이 대통령으로선 좀 억울할 것이다. 압도적 지지율로 당선되고 곧바로 국회 과반수 의석까지 장악하며 최적의 정치환경에서 첫 발을 내디뎠지만, 행운은 거기까지. 예상도 못한 촛불시위, 뒤이어 밀려온 글로벌 금융위기, 그 와중에 터진 노 전 대통령의 자살역풍, 대반전의 카드로 뽑았던 세종시 수정안의 무산, 그 결과 지방선거 참패까지. 사실 뭣 하나 제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이 대통령과 정부의 책임이긴 하나, 억세게 운이 없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이제 MB정부에 주어진 시간은 1년 반. 차기 대통령이 정해질 대선까지 실질 임기는 꼭 1년 6개월이 남았다. 이 대통령으로선 이제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를 정말로 심각하게 고민하고, 거기에 집중해야 할 때라고 본다.
물론 '너무 늦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고, 할 수 없는 것 투성이라는 레임덕 현실을 아마도 뼛속까지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것일까.
미국엔 "레임덕에도 백악관의 하루는 일반 국민들의 평생보다도 길다"는 얘기가 있다. 일반인들이 평생토록 하려 해도 할 수 없는 일을, 백악관에선 하루에라도 해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얘기다. 청와대도 마찬가지다. 하물며 1년 반이 남았는데, 간절히 원한다면 뭘 못하겠는가.
일자리 수치 목표에 몇 만개가 미달했느니 따지는 일 같은 건 안 해도 된다. 물가 목표 맞추려고 밀가루 값까지 붙들고 있는 것 또한 안 해도 되는 일이다. '메가뱅크'같은 것 역시 헛심만 쓰는 일이다.
하루에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대신 꼭 필요한 것, 예컨대 간단한 상비약을 약국 밖으로 꺼내는 일엔 좀 더 힘을 쏟아도 된다. 아무리 정치적 파워가 크다 한들, 약사는 6만 명이고 의약소비자(국민)는 4,800만 명이다. 다수 국민을 위한 정책인데, 그만큼 명분과 후생효과가 있는데, 뭘 주저한단 말인지.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의 눈치보기를 탓하지만, 정치인들이 두려워하는 건 약사가 아니라 여론이다. 대통령과 청와대가 보건복지부만 질책할 것이 아니라 직접 나서 여론을 조성하고 그쪽으로 밀어붙인다면, 어떤 정치인들이 따라오지 않을까.
꼭 필요한 것 하나하나 해나가다 보면, 1년 반 동안에도 얼마든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러면 서민이든 동반성장이든 혹은 다른 무엇이든, MB정부의 키워드도 저절로 생겨날 것이다. 후세에 4대강 정부, 토목대통령으로만 기억되는 건 너무도 슬픈 일이다.
이성철 경제부장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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