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그 중에서도 클래식은 여든이 넘은 저에게 아드레날린입니다.”
6ㆍ25남침과 서울수복 첫 보도, 1948년 5ㆍ10 선거,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 1949년 백범 장례식 실황중계 등으로 알려진 재미 방송인이자 수필가인 위진록(83)씨. 전쟁 중에 UN심리전부대에 취업하면서 한국을 떠났던 그가 최근 서울을 찾았다. 고향 황해도 재령에서 남한으로, 서울에서 일본 도쿄로, 다시 미국 LA로 떠도는 고달픈 그의 삶을 지탱해준 클래식 음악 이야기를 정리한 책 출판을 위해서다. 그는 “나라가 전쟁으로 어수선할 때도, 이국 땅에서 외로운 날을 보냈을 때도, 부인과 사별한 충격에 빠져 있을 때도 힘을 준 건 클래식이었다”며 “클래식이 주는 기쁨을 다른 사람들도 느껴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1950년 6월25일 오전 6시 북한의 남침을 처음으로 알린 현대사의 산증인. 그는 “오늘 새벽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쳐들어왔습니다”는 소식을 전한 뒤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을 찾아 축구경기를 구경했다. “왕왕 있던 일이라 그런 소식을 알리는 아나운서로서 안일하게 생각했죠.” 당시 사태가 심각해지자 사람들은 하나 둘 짐을 싸서 한강을 넘었지만, 위씨는 서울에 남았다. 광복 후 고향을 떠나온 것도 서러운데 더는 남쪽으로 내려가기 싫었던 탓도 있었지만 열 아홉 나이에 어렵사리 합격한 방송국 아나운서 자리를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북한군은 전향서 작성을 요구했다. 이념이 달라 남쪽으로 온 터에 돌아갈 수 없었던 그는 “북이 고향이요, 출신학교는 평양사범학교였던 터라 북한군에 잘못 걸렸다가는 총살을 당하겠다 싶어 숨어 지냈다”고 했다. 훗날 영화배우가 된 최무룡씨 등이 그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 그는 “숨어 지내는 동안 단파 라디오로 일본의 클래식 방송을 즐겨 들었는데, 음악을 듣는 순간만큼은 천국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며 “분단과 전쟁으로 잃은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약 세 달 뒤 9ㆍ28 서울수복의 첫 소식을 알리는 영광도 그에게 주어졌다. 위씨는 “상당수 아나운서들이 북한군의 폭압에 못 이겨 전향했기 때문에 마이크를 잡을 자격이 되는 이가 얼마 없었다”며 “서울에서 숨어 지내고 있던 나에게 행운이 왔다”고 했다.
최연소 아나운서였음에도 불구하고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중계하며 탄탄대로를 걷던 그에게 미군의 한 심리장교가 접근하면서 그의 인생은 틀어졌다. 서울수복의 소식을 전한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던 미군이 그에게 “미국 방송인 월터 크롱카이트를 닮았다. 도쿄에 있는 유엔사령부에서 한 달만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것. 그는 “당시 전세로는 ‘한 달 뒤 종전’이야기에 의심할 여지는 없어 응했다”고 했다. 중국과 한반도를 상대로 방송심리전을 벌이던 곳이었다. 일본어는 능했지만 외로웠다. 그런 그를 지켜준 것 또한 음악이었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 비창 중 1악장 중 제2주제(안단테)를 즐겨 들었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었죠. 여기서 클래식 방송을 하면 좋겠다 싶었죠.” 미군의 허락이 떨어졌다. ‘음악의 향연’이라는 프로그램을 맡았다. 외로움도 달래고 클래식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계기가 됐다. 그러다 보니 일본생활은 약속했던 한 달이 지나고 22년이나 이어졌다. 음악이 그의 발목을 잡은 셈.
유엔사령부 일이 끝난 뒤 고국으로 돌아오고자 했지만 이번엔 그의 자식(2남1녀)들이 발목을 잡았다. “도쿄 미군학교에서 수학한 자식들의 교육 문제를 생각하니 미국으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민자로서 순탄치 않은 생활이 이어졌다. 그는 “이민자라 제대로 된 직업을 수할 수 없어 햄버거 가게를 했다”며 “당시 ‘차이니즈, 차이니즈’라고 놀려대던 동네 사람들이 ‘하이, 미스터 위’라고 인사를 건네기까지는 7년이 걸렸다”고 회상했다.
이후 서점을 운영하면서 동네신문인 ‘코리안뉴스’를 5년간 발행하는가 하면 LA 각 라디오서 클래식 관련 프로그램을 10년간 진행했다. 또 그는 틈나는 대로 교민 매체에 ‘클래식 초대석’이라는 격주로 연재하는가 하면 직접 해설을 맡은 ‘작은 음악회’등을 개최하며 클래식의 전도사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제가 여든 셋으로 안 보인다고요? 그렇다면 클래식 덕분일 겁니다.”
정민승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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