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은 시작됐다" 국내 로펌들도 수익분배구조 조정 '인재 문단속'
로펌 간 경쟁의 승패는 같은 비용으로 얼마나 수준 높은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가에 달려있다.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개인 변호사의 수준이 떨어진다면, 로펌의 덩치가 아무리 크더라도 경쟁에서 밀릴 확률이 높다. 이러니 우수 인력 확보의 중요성은 법률시장 개방 시대에 더 커진다. 법률 지식은 물론이고 국제적 감각과 외국어 능력까지 갖춘 인재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개방을 앞둔 국내 로펌과 영미 로펌이 한정된 인력풀을 놓고 ‘총성없는 전쟁’을 벌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먼저 칼을 뽑아 든 쪽은 해외 로펌이다. 그 중에서도 국내 시장 진출을 목전에 둔 영국 로펌의 움직임이 가장 활발하다. 디엘에이 파이퍼(DLA Piper)는 올 초 김앤장 출신의 이원조 변호사를 영입, 한국 진출 실무를 맡기고 있다. 클리포드 찬스(Clifford Chance)는 미국 로펌에서 기업자문을 맡았던 김현석 변호사를 최근 영입했다. 프레쉬필즈(Freshfirlds)도 미국계 로펌 드비보이스 앤 플림프턴(Debevoise & Plimpton)의 한국 팀장이었던 장익성 변호사를 영입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이후 시장에 적극 진출할 예정인 미국 로펌도 물밑 작업이 한창이다. 설리반 앤 크롬웰(Sullivan & Cromwell)은 최근까지 한화석유화학 법무팀에서 일했던 박노욱 변호사를 영입했다. 또 존스 데이(Jones Day)는 김앤장에서 근무하던 필립 리 프랑스 변호사를, 베이커 앤 맥킨지(Baker & Mckengie)는 화우에서 근무하던 조한진 변호사를 각각 채용했다.
하지만 이런 사례는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 시장이 개방되면 영미 로펌들이 공개적으로 영입경쟁에 뛰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외국계 로펌에서 영입 업무를 담당하는 A 파트너 변호사는 “한국의 대형 로펌에서 근무한 중견 변호사 B씨도 영국 로펌에 영입되기 직전이고 알려진 것보다 더 많은 물밑 영입 작업이 진행 중”이라며 “헤드헌터나 직접 접촉을 통해 진행중인 영입 작업에 한국 변호사 대부분이 아주 적극적으로 응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외국 로펌의 공세가 이어지자 국내 로펌의 대응도 한층 분주해졌다. 일단은 수성에 방점이 찍혀 있다. 최근 외국변호사가 영입의 타깃이 됐지만, 시장 개방 이후엔 한국적 특수성을 잘 이해하고 있으면서 국제적 마인드를 가진 국내 변호사들이 대상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집안 단속에 들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국내 로펌 고위 관계자는 “성과 중심의 수익분배 구조로 전환해 인력 유출 요인을 줄이고, 변호사들의 ‘로망’인 파트너 변호사까지 올라 가는 길을 합리적으로 제시하는 등 우수 인력 지키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밝혔다.
해외 로펌이 아직 접근하기 어려운 신규 법조인력 시장에서의 ‘입도선매(立稻先賣)’ 작업도 한창이다. 김앤장은 이미 국제적 능력을 갖춘 로스쿨생의 채용을 일부 확정했으며, 다른 로펌들도 로스쿨 방학 기간 동안 인턴십 프로그램을 실시, 인재 확보에 총력을 기울일 예정이다. 중소형 로펌 20여 곳도 이달 29일 서울대 로스쿨생을 상대로 첫 취업박람회를 개최한다. 모 로펌 관계자는 “과거 사법시험 합격자와 달리 로스쿨생은 해외 경험과 국제적 감각을 갖춘 인재가 많다”며 “5년 동안 단계적으로 시장 개방이 이뤄지는 만큼 선제적으로 우수 로스쿨생을 확보해 둔다면 해외 로펌과 차별화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런던ㆍ홍콩=정재호기자 next88@hk.co.kr
■ 변호사단체 역할론
“영국 변호사협회 국제과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자국 로펌이 진출하고자 하는 지역의 정보를 지속적으로 수집하고, 수집된 정보를 로펌에 적절하게 제공하는 것이다.”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한 아나 프락(Anna Prag) 영국 변호사협회 북아시아-태평양 담당 국제 과장은 자신의 역할을 이렇게 설명했다. 변협이 단순한 변호사 이익단체가 아니라, 국익과 법률시장 수익창출을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영국 로펌의 활발한 해외 진출 배경에는 이처럼 영국 변협 국제과의 지원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영국 변협은 15만명의 사무변호사(송무는 안 하고 자문만 하는 변호사)가 소속돼 있으며, 25명의 인원으로 구성된 국제과는 전세계를 각 지부 별로 나눠 독립 운영되고 있다. 영국 변협 국제과의 첫번째 역할은 영국 로펌이 진출하려는 국가와의 네트워크 형성이다. 실제로 지난 4월 5개 영국 로펌과 국내 대기업과의 미팅을 영국 변협이 주선했으며, 올 12월 한국에서 개최되는 아시아 법률가 대회에도 영국 로펌 대표 변호사들을 이끌고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영국 변협은 공식적인 모임을 주선하는 것 외에도, 한국 시장에 진출하고자 하는 영국 로펌들을 위해 비정기적으로 설명회와 세미나도 개최한다. 영국 로펌의 한 파트너 변호사는 “영국 로펌이 변협에 충분한 자금을 지원하는 만큼 변협도 적극적인 자세로 우리의 해외 활동을 보조한다”며 “신규 시장에 진출할 때 현지 네트워크 형성 등에 많은 도움을 주는 게 사실”이라고 전했다.
이에 비해 대한변협 국제과의 규모와 역할은 초라하기만 하다. 현재 변협 국제과는 국제이사를 포함해 총 인원이 5명에 불과하다. 이들은 주로 국제회의 한국 유치, 국내 변호사 교육프로그램 진행 등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인력의 한계로 국내 로펌의 해외 진출을 위한 선제적 정보 수집활동은 불가능한 게 현실이다.
미국 변호사 자격을 가진 한 국제변호사는 “대한변협이 국제과에 인력 및 예산을 추가 편성해 국제화 흐름에 발 맞출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대한변협 최정환 국제이사는 “영국 변협처럼 풍부한 정보 제공 등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이 있어야 한다”며 “정부가 법률 시장도 하나의 산업으로 보고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재호기자
■ 전문가들이 말하는 국내 로펌 경쟁력 방안
로펌업계도 지불한 금액만큼 서비스를 제공하는 ‘3차 산업’이다. 그러나 법률시장의 건전성이 국가의 사법질서 유지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점을 고려한다면, 시장개방에 따른 경쟁의 격화를 단순히 경제논리로만 접근하는 것은 곤란하다.
대부분의 전문가들도 ‘국내 로펌들이 알아서 잘 대응하면 된다’는 논리는 무책임하다면서 궁극적으로 정부와 로펌업계, 로스쿨이 함께 장기적 관점에서 대응 카드를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우선 국내 로펌의 체질 개선이 변화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 그 중에서도 전문성 강화와 수익분배 구조의 합리화가 최우선 과제로 꼽힌다.
영국과 미국, 한국 로펌에서 모두 근무한 경험이 있는 한 변호사는 “국내 조세 분야에 강점이 있는 법무법인 율촌의 경우 해외 로펌도 쉽게 상대하기 어렵다는 게 대체적 평가”라며 “규모 면에서 비교가 어려운 외국 로펌에게 ‘덩치’로 맞붙겠다는 비현실적 전략보다 특정 영역의 전문화 작업을 지금부터 추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영국 로펌 디엘에이 파이퍼(DLA Piper)의 경우 한국 조선산업의 발전을 예측하고 그 분야의 전문가인 마이클 김 변호사를 1997년 영입, 토종 로펌보다 더 많은 경험치를 축적했다. 국내 기업 법무팀 관계자는 “시장 개방이 된다면 기업 입장에선 특성화된 로펌에게 일을 맡길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한국 사법시험을 통과한 뒤 해외 로펌에서 근무 중인 또 다른 변호사는 “시장에서 실질적인 ‘선수’로 뛸 개인 변호사에게 능력에 따른 수익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지금처럼 고급 인력 유출을 막을 방법이 없다”며 “싸울 선수가 부족한 로펌은 아무런 미래가 없다”고 단언했다.
로펌의 체질 개선 작업과 함께 병행돼야 할 부분은 국제 인재 양성 시스템 마련이다. 국내 로스쿨 관계자는 “로스쿨이 국내 유명 로펌과 연계해 국제 법무 교육을 실무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며 “현재 교육 시스템은 ‘수박 겉핥기’에 불과해 아무 소용이 없다”고 꼬집었다. 국내 대형 로펌 관계자도 “현재는 로펌별로 자체 인턴십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정부의 지원을 받아 보다 체계적이고 차별화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전문가들은 수세적 대응이 아니라 선제적 시장 공략으로 국내 법률시장의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아시아 시장 경험이 풍부한 한 국제 변호사는 “인도 법률시장은 정서적으로 가까운 싱가포르와 중국 로펌이 제대로 정착했지만 서양 로펌들은 대부분 적응에 실패했다”며 “한국 기업의 아시아 진출이 활발한 만큼 이 부분을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면 신규 수익 창출로 한국 로펌의 경쟁력도 상당히 올라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재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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