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회의를 해도 뭐 하나 쉽게 결정되는 게 없다. 지지부진하던 일도 부장급 인사가 '이게 좋겠다'고 말하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그런 풍토에서 창의성을 살리는 건 언감생심이다."(대기업 계열 영화 투자배급사 전 직원 A씨)
국내 독립영화계가 최근 수작을 잇따라 내놓으며 일취월장하고 있는 반면 상업영화는 창작의 활기를 잃은 모양새다. 올해 상반기 상업영화에 대한 영화관계자들의 평가는 냉정하다. "스스로가 만든 수렁 속에 계속 빠져드는 형국"(B영화사 대표) "문제작이라 할 작품이 전혀 없다. 창작의 활기가 느껴지지 않는다"(C영화사 대표)는 매운 비판이 적지 않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CJ E&M 영화사업 부문과 롯데엔터테인먼트, 쇼박스 등 대기업 계열 투자배급사의 경직된 의사결정 구조와 제작 관행에 화살이 주로 쏟아진다. "조직과 자본을 앞세워 영화계를 쥐락펴락하고 있지만 창의성과 신진 인력 발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날 선 목소리가 적지 않다.
충무로 토착 영화인들의 비판은 대기업 계열 투자사들의 기획 진행비 축소와 수익 배분에 몰려 있다. 지난해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연구보고서 '한국영화 기획 개발 경쟁력 강화 방안 연구'에 따르면 2007년 한국영화의 평균 기획 진행비는 2,200만원으로 2006년(4,700만원)의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기획 진행비는 시나리오 개발과 사무실 운영비, 식비 등이 포함된 일종의 영화 제작 착수금. 최근 기획 진행비가 더욱 축소돼 "신선한 소재 개발은커녕 살림살이 꾸리기조차 힘들다"는 영화사들의 볼멘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이윤 배분에 대한 영화인들의 불만은 특히 폭발 직전이다. 투자사와 제작사의 일반적인 수익 배분 비율은 보통 6 대 4. 그러나 투자사가 공동 제작 형태로 이익을 늘리며 제작사의 몫이 줄어들고 있다는 게 제작사들의 주장이다. 한 영화사 대표는 "기획 진행비 없이 어렵게 영화를 기획하고 제작하고도 별로 남는 게 없다. 우월적 지위에 있는 투자사의 지분 추가 배정 요구를 거부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고 주장했다.
창의력은 존중하지 않고 돈줄도 마른 형국이니 인재들의 발길도 줄어드는 추세다. 2009년 독립영화로 시선을 모은 한 감독은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지 못하고 큰 돈도 쥐지 못하는데 굳이 상업영화 쪽에 발을 들일 필요가 있냐"고 반문했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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