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소설가 커트 보네거트는 <나라 없는 사람> (2005)에서 세상의 모든 소설을 간단하게 분류하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두 개의 축을 그려 좌표를 만들자. 세로축은 행복과 불행의 정도를, 가로축은 시간의 흐름을 뜻한다. 모든 소설의 줄거리는 이 좌표 위에 선을 그려 요약할 수 있다. 예컨대 카프카의 <변신> 은 세로축의 저 아래쪽에서 시작해 오른쪽으로 곧게 진행되다가 문득 아래로 꺾여 끝없이 추락하는 선을 이룰 것이다. 안 그래도 불행하게 살던 사내가 벌레가 되어 무한대로 불행해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변신> 나라>
지금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전형적인 서민의 삶의 서사를 저 좌표 위에 선으로 나타낸다면 어떤 모양을 이룰까. (문학이론에서 '전형적'이라는 말은 '평균적'이라는 말과는 좀 다르다. 사회 구조의 핵심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사례일 때 이를 '전형적'이라 부른다. 진실은 평균에 있지 않다.) 세로축 저 아래쪽에서 시작된 선이 완만한 각도로 점점 더 오른쪽 아래로 휘어져 내려가는 형태를 이루지 않을까? 대체로 불행하게 살다가 조금씩 더 불행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우울한 예측의 근거는 안타깝게도 수두룩하다.
'한국'이라는 이름의 주인공이 있다고 하자. 한국씨는 태어난 뒤 몇 년이 지나자마자 곧바로 공교육과 사교육의 이중 지옥에 내던져졌다. 15년을 끔찍하게 시달리다가 겨우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은 거의 기업이고 무한경쟁의 훈련소다. 등록금 부담은 살인적인데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서 학자금 대출을 받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은 20세의 건장한 청년이 자력으로 대학공부를 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생존을 위해 죽어라 뛰어서 남은 것은 빈곤한 추억, 초라한 성적, 막대한 빚이다.
어찌어찌하여 겨우 졸업을 하기는 했지만 청년실업문제에 또 부딪친다. 통계청의 청년실업률 발표와는 달리 현장의 체감 분위기는 훨씬 더 처절할 것이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학자금 대출 빚을 갚을 길이 막막하다. 결국 취직을 못해 20대에 신용불량자가 되는 경우들도 허다하지만 한국씨는 다행히 일자리를 얻어 빚을 갚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비정규직이다. 심리적으로 불안정할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숨 막히는 나날들이다. 그 와중에도 연애를 시작했지만 결혼은 또 언제 할 수 있을 것인가.
결혼을 하기는 했지만 두 개의 난관이 또 기다린다. 육아문제와 주택문제다. 복지시스템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데 이 나라는 자꾸 애를 낳으라고만 한다. 낳은들 어떻게 키울 것이며 막대한 사교육비는 또 어찌 감당하나.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가 주변에 많은 이유를 그제야 이해한다. 집도 문제다. 이 나라에서 집은 재산증식의 수단이다. 엄청난 금액을 대출 받아 겨우 집을 샀다. 이자를 붓느라 삶의 내실은 엉망이다. 이런 식이니 무엇을 위해 사는가 하고 물을 여유가 없다. 한국씨는, 그냥, 필사적으로, 산다.
이것이 대한민국이라는 소설의 서사다. 소설 속 인물의 삶은 작가가 짜놓은 틀 안에서 움직인다. 우리 삶의 서사도 관료들과 정치인들이 짜놓은 시스템 속에서 흘러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소설 속의 인물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은 다행이다. 작중인물들은 서사의 흐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작가에게 항의할 수 없지만 우리는 광장으로 나가서 항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덕분에 역사라는 서사의 선은, 앞서 말한 좌표 위에서, 결국 오른쪽 위를 향해 계단식으로 올라가는 모양을 이룰 것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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