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문시장 1차 타깃… 무한 쟁탈전 불보듯
“1단계 개방 단계에선 자국법과 공법만 자문이 허용된다지만, 사실상 법률 시장 문이 활짝 열린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국내 기업이 영국 로펌으로부터 국내 로펌과 같은 수준의 법률 서비스를 받은 뒤 수임료 항목에는 ‘외국 진출에 대한 자문’으로 기재하면 법망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계적 개방도 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7월이 되면 영국 로펌이 쓰나미처럼 몰려 올 것이다.”
국내 대형 로펌에 소속된 A변호사는 법률시장 개방이 몰고 올 국내 시장의 판도 변화를 이렇게 예측했다. 다른 국내 법조계 인사들도 ‘쓰나미’ 같은 자극적 표현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A변호사처럼 영국 로펌 진출이 법률 시장에 큰 변화가 올 것이라는 점에는 대부분 동의하는 분위기다.
우선 주목되는 것이 토종 로펌들과 경쟁이 몰고 올 업계의 순위 변화이다. 현재 업계 상위 6위권에 포함되는 김앤장, 광장, 태평양, 세종, 율촌, 화우는 그나마 우수 해외 인력을 보충하고 역으로 아시아 시장을 진출하는 등 영국 로펌과의 ‘전면전’을 대비해 왔다. 하지만 나머지 중소형 로펌들은 말 그대로 시장개방에 ‘속수무책’인 상태다.
특히 중소형 로펌 대부분은 M&A 등 기업 자문 시장보다 국내 송무 업무에 역량이 집중된 구조를 갖고 있다. 기업 자문 분야에 강점이 있는 영국 로펌이 합병에 따른 시너지 효과를 가장 높게 얻을 수 있는 대상인 셈이다. 한국 로펌의 모 중견 변호사는 “이미 규모가 어중간한 국내 로펌 사이에서는 생존을 위한 합종ㆍ연횡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며 “그들의 움직임이 자생을 위한 것인지 영 로펌에 인수되기 위한 것인지 아직 알 수 없지만, 7월 이후 국내 로펌의 대변동은 불 보듯 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물론 대형 로펌도 영국 로펌과의 합병 가능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영국 로펌이 시장 개방과 함께 업계 10위권 안에 드는 독일 로펌을 선제적으로 인수 합병함으로써 1,2위 권 독일 로펌과 경쟁에 뛰어든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상위권 로펌에 대한 인수합병이 이뤄질 경우, 국내 로펌 지형은 격변을 맞을 수도 있다.
디엘에이 파이퍼(DLA Piper) 등 한국 진출에 적극적인 영국 로펌들이 한국인 변호사에게 현지 경영권 일부를 넘기는 전략을 사용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대형 로펌과의 인수합병을 염두에 둔 포석으로 풀이된다. 영국 로펌 관계자는 “영국에서 온 변호사가 군림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어떤 해외 시장에서도 성공할 수 없다”며 “이미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수준에서 현지 경영을 보장해 줄 방침”이라고 말했다.
물론 영국 로펌이 한국 시장에 진출하면 법률 시장 전체 규모를 키우는 등 여러 가지 긍정적 효과도 있을 전망이다. 시장에서의 경쟁이 더 강조되면, 자연히 법률 서비스의 질이 제고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도 여러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특히 한국 로펌이 국내외에서 거대한 영국 로펌과 경쟁을 지속하면서 자연히 국제적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디엘에이 파이퍼의 나이젤 대표는 “글로벌 로펌 엘리트들가 된다는 것은 기술이나 노하우 전수가 필요한 부분”이라며 “영 로펌에게 전수받은 기술로 한국 변호사들은 더 국제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시장이 커지면 과다한 경쟁과 불필요한 소송이 남발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국내 로펌의 한 고위 인사는 “과거 해외 대기업이 국내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할 경우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는 데다 강제성 부분도 불확실해 포기하곤 했다”며 “하지만 영국 로펌이 국내에 들어오면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도 쉽게 소송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런던ㆍ홍콩=정재호기자 next88@hk.co.kr
■ 英美 로펌 진출한 국가는
영국 로펌의 한국 진출이 보름 앞으로 다가오면서, 먼저 시장을 개방한 독일과 일본의 사례도 주목받고 있다. 두 나라 모두 우리와 같은 대륙법계 체계를 갖고 있고 중소 규모의 로펌과 개인 변호사 위주로 시장이 유지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1998년 법률 시장을 개방한 독일은 당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법률시장이었다. 시장이 열리자마자 영국과 미국 로펌은 경쟁력 있는 독일 로펌들을 인수합병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10대 로펌 대부분이 영미계 로펌에 합병되거나 합작 형태로 전환됐다. 현재 '토종 로펌'으로 남은 곳은 헨겔러 뮬러(Hengeler Mueller), 글라이스 루츠(Gleiss Lutz) 등 2,3곳에 불과하다.
하지만 독일 내에서도 시장개방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미국계 독일 로펌인 프레쉬필즈 브룩하우스 데링거(Freshfields Bruckhaus Deringer)에 소속된 한국인 정하성 변호사는 "영미 로펌의 시장 진입을 통해 독일 변호사들의 국제화가 이루어졌다"며 "이전에는 독일 내부 시장에만 전념해도 아쉬울 것이 없었던 독일 변호사들이 해외로 눈을 돌렸고 해외 시장 경쟁력을 갖추게 됐다"고 말했다. 시장 개방에 따른 반사이익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정 변호사는 또 "영미 로펌에게 시장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지적이 있지만, 주 고객이 독일 기업이기 때문에 독일 파트너 변호사의 입지가 강하다"며 "프레쉬필즈의 경우 경영권을 독일 변호사들이 장악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1987년 시장 문호를 연 뒤 2004년 전면 개방의 길을 걸은 일본은 독일과 사정은 비슷했지만 결과는 사뭇 달랐다. 현재 일본 로펌 규모 상위 10위권에는 베이커 앤 메킨지-도쿄 아오야미 아오키 코마, 모리슨 포스터-이토 미토미 등 3곳의 미국계 로펌만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먼저 17년 간의 단계적 개방이 원인으로 꼽힌다. 점진적 개방으로 토종 로펌의 경쟁력을 키울 시간을 마련했다는 해석이다. 또 해외 로펌에 호의적이지 않은 일본 기업과 국민 정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물론 일본 로펌도 대기업의 해외투자 계약 등 외국 관련 자문이나 소송은 대부분 영미 로펌에 빼앗겨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는 평가도 있다.
그럼에도 국내에선 단계적 개방을 통해 시장의 충격을 줄인 '일본 모델'을 더 선호하는 분위기이다. 국내 로펌의 한 변호사는 "법률시장과 사법제도는 시장논리가 아닌 국가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며 "국내법과 국민 법정서에 서툰 외국 로펌이 사법에 관여하면 법률 서비스 전반에 불필요한 문제가 생겨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재호기자
■ 한국시장 진출 느긋한 이유
현재 전세계 법률시장은 영국과 미국이 양분하고 있다. 이들은 유럽 법률 시장을 두고 1차전을 치룬 후 일본과 중국, 홍콩 진출 당시에도 경쟁적으로 시장 선점 경쟁을 벌인 바 있다. 때문에 미국 로펌들이 영국 로펌의 한국 진출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느 때보다 날카롭다.
특히 미국 로펌 아시아 전진 기지인 홍콩 사무소 소속의 한국인 변호사들은 누구보다도 영국 로펌의 진출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 이들은 “아직 관망할 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면서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되면 우리가 결국 최종 승자가 될 것”이라는 자신감을 숨기지 않았다.
미국 로펌의 자신감은 한국 기업의 대형 소송을 수 차례 성공시키며 형성된 파트너십에 기반한다. 실제로 미국 로펌인 심슨 앤 대처(Simpson & Thacher)는 한화 그룹과 예금보험공사 사이의 대한생명 지분매각 분쟁에서 한화 그룹을 대리, 중재인 3인 전원 일치로 한화 측의 승소를 이끌어 낸 경험이 있다. 같은 미국계 로펌인 클리어리 가틀립(Cleary Gottlieb)은 1997년 IMF사태 이후 대우 그룹 구조조정 과정에 참가한 바 있다. 이외에도 미국 로펌들은 한국 정부를 대행해 외채 발행 업무를 맡는 등 국내외에서 긴밀한 관계를 10여년 동안 유지해왔다.
이외에도 미국 로펌은 미국이 해외 자본 시장과 M&A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현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법률 서비스는 결국 큰 줄기의 경제 흐름에 따라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미국 로펌의 경쟁력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논리다. 클리어리 가틀립의 한상진 변호사는 “영국 로펌이 규모와 양으로 밀고 나가는 스타일이라면 미국 로펌은 고부가가치 사업 등 어려운 시장에 강점이 있다”며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미국의 로펌이 한국에 들어가면 M&A 등 핵심 시장에 큰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전망했다.
심슨 앤 대처의 손영진 변호사도 “영국 로펌이 해외 네트워크 등 시스템이 잘 구축됐다지만 오히려 의사 결정에 시간이 걸리는 등 장점이 단점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손 변호사는 “그 동안 영국 로펌이 먼저 해외 시장을 진출한 경우가 많지만, 결국 실용적이고 창조적인 미국 로펌이 시장 판도를 바꿔왔다”고 자신했다.
정재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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