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물건값은 올랐다가 떨어지기도 하는데 우리나라는 한번 오르면 내려가지 않는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13일 한 조찬강연에서 최근 고물가의 배경으로, 세계적으로 좀처럼 유례가 없는 '하방경직성'을 강조했다. 말 그대로 한번 올라간 가격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는 얘기. 상승의 형태도 선진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을 띤다는데, 정부는 독과점과 담합 구조를 근본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우선 한국만의 유별난 물가상승 패턴은 '계단식' 상승. 실제 재정부 분석(그림 참조)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국내 남자구두, 우유, 여성복, 침대 등 주요품목들의 가격은 마치 계단처럼 한동안 오르지 않다가 한꺼번에 오르는 형태를 보였다. 같은 기간 미국의 동일상품 가격이 ▦꾸준히 비슷한 가격대에서 자주 오르내리거나(남자신발, 침실가구) ▦장ㆍ단기 적으로 큰 폭의 오르내림을 반복하는(여성복, 우유) 등 다양한 형태로 움직인 것과 크게 대비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한 업체의 가격이 아니라 품목 전체의 평균가격이 계단식으로 뛴다는 점. 이것은 업계 전체가 비슷한 시기에 가격을 한꺼번에 조정했다는 의미다. 이는 산업계 전반의 '경쟁 실종' 상황, 나아가 '담합 구조'때문이란 게 정부의 분석이다. 윤종원 재정부 경제정책국장은 "소수 대표기업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독과점 산업은 물론, 다수 업체가 경쟁하는 산업에도 담합적인 관행이 여전히 만연해 있다"며 "이에 따라 기업들이 서로간의 경쟁은 꺼리면서 자기 편의대로 가격을 정하다 보니 가격이 좀처럼 내리지 않고 계단식으로 뛰는 특이한 형태를 보인다"고 말했다.
복잡한 유통구조와 높은 유통마진도 한국식 인플레이션을 부추기는 또 다른 원인으로 꼽힌다. 재정부 분석에 따르면 2000~2009년 사이 국내 연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생산자물가보다 0.9%포인트나 높았다. ▦둘 사이 차이가 없는 영국이나 ▦생산자물가보다 소비자물가상승률이 오히려 낮았던 미국(-0.1%포인트), 일본(-0.4%포인트)과 비교하면 생산단계 이후, 즉 유통마진이 많이 붙었다는 의미다. 재정부 관계자는 "선진국보다 유통구조가 복잡한데다 진입장벽ㆍ관세율도 높아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유통산업이 1% 성장하면 소비자물가가 0.4%포인트나 떨어질 것이란 연구결과가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이처럼 독과점적 가격구조, 만연해 있는 담합관행, 높은 유통마진 등 '한국형 인플레'요소가 남아 있는 한 아무리 금리를 높이고 정부비축물량 방출을 늘려도 물가는 잡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박 장관도 이와 관련, "가격의 하방경직성을 깨기 위해 진입규제 완화, 정보공개 강화, 불공정거래 감시 노력 등을 더 가속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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