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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의 시로 여는 아침] 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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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의 시로 여는 아침] 국수

입력
2011.06.13 05:34
0 0

백석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여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 사발에 그득히 사리워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옛적 큰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 아바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素朴)한 것은 무엇인가

※ 은댕이: 언저리

예데가리밭: 산에 있는 오래된 조그만 비탈밭

산멍에: 산모아. 전설상의 커다란 뱀. 이무기

분틀: 국수틀

집등색이: 짚이나 칡덩굴로 짜서 만든 자리

댕추가루: 고춧가루

탄수 내음새: 식초 냄새

‘귀찮으니 국수나 끓여 먹자.’

● 황해도 출신 할머니는 월남해서 수제비와 국수를 물리게 드셨대요. 할머니 손에서 자란 제게 국수는 그저 가난하고 피로한 이의 단촐한 한 끼.

그렇지만 백석을 만나고 달라졌어요. 국수는 동네 사람들 전부를 흥성흥성 들뜬 기분으로 모이게 하는 음식. 하얗게 쌓인 눈과 그보다 더 새하얀 국수틀과 쩡하니 익은 동치미와 갓 잡은 산꿩 고기와 의젓한 마음, 텁텁한 꿈 모두를 몰고 오는 음식.

홍대 앞 칼국수집 두리반을 만나며 또 달라졌어요. 두리반은 여럿이 둘러앉아 먹을 수 있는 크고 둥근 상이래요. 흰 국수 가락보다 더 길게 고생스러웠던 얘기며 국수 한 그릇을 지키기 위해 모인 이들의 냄새와 그 살뜰함으로 가득한 음식… 철거 싸움에서 이긴 두리반의 칼국수를 호로록 호로록 먹이고 싶어요. 더 안 보이는 곳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며 지친 이들을 죄다 불러 모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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