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 한국일보가 창간 57주년을 맞아 동아시아연구원(EAI)과 함께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가장 먼저 눈길이 간 것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 대한 유권자들의 착시 현상이었다.
정당을 기준으로 내년 대선에서 투표할 후보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49.5%가 야권 단일후보를 꼽아 한나라당 후보 34%를 크게 웃돌았다. 반면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 조사에서는 박 전 대표가 36.2%로 2위인 민주당 손학규 대표(9.7%)와 비교하기조차 민망한 차이를 보였다. 앞서 EAI의 4월 여론조사에서도 다수의 응답자가 내년 대선에서 현 정권을 심판해야 한다고 밝혔지만, 정작 예비후보 지지율에서는 박 전 대표를 압도적 1위로 꼽았던 흐름이 그대로 반복됐다.
이런 결과는 두 가지로 이해된다. 하나는 야권에 대한 유권자들의 주문이다. 현 정권에 대한 민심의 반발이 뚜렷하다고 그것이 저절로 야당 후보 지지로 흡수되리라는 섣부른 기대는 금물인 만큼 전국적으로 고른 지지를 흡인할 후보와 정책을 만들어내라는 요구다.
어깨 무거워진 박근혜
또 다른 요인은 여당의 유력한 대선주자인 박 전 대표를 현 정권과 따로 떼어보려는 유권자들의 인지 성향이다. 세종시 수정안을 비롯한 굵직한 정책 현안에서 주류와 다른 주장을 고집스럽게 관철한 사례가 누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여당 내의 야당'으로 여겨주는 착시 현상은 박 전 대표에 유리하다.
'6월 항쟁'이 시작된 1987년 6월10일 집권 민정당은 노태우 대표를 연말의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했다. 그는 수락연설에서 대선과 '88 서울 올림픽'이라는 대사를 무사히 치른 후 야당과 개헌을 협의할 수 있다고 밝혔지만 20일도 지나지 않아 '6ㆍ29 선언'으로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을 축으로 한 권력 핵심부와 사전 교감이 있었고, 정치적 대안의 하나로서 꾸준히 검토돼 왔던 것으로 나중에 드러났지만, '6ㆍ29 선언'은 한동안 노 후보의 결단의 산물로 비쳤다. 그 결과 그는 전두환 정권과의 부분적 차별화에 성공했고, 3김 분열이라는 절호의 조건까지 더해져 연말 대선에서 승리했다. 두 사람이 사실상의 군사 쿠데타인 '5ㆍ17'을 통해 정계 한복판으로 진입한,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임을 국민들이 잊었다기보다 정치적 이미지 형성에 순간적 착각이 작용한 결과다.
그런데 박 전 대표의 당내 위상이 이전과는 사뭇 달라졌다는 점에서 유권자들의 착시는 기댈 요인이 못 된다. 최근 한나라당 내부의 권력이동에 속도가 붙었다. '4ㆍ27 재보선' 패배를 고비로 비주류였던 친박계가 신주류로 떠올랐다. 원내대표 경선과 최근의 전당대회 룰 확정 과정에서 잇따라 친이계를 눌렀고, 당권ㆍ대권 분리 규정 유지는 박 전 대표가 직접 나서서 관철했다. 중간파와 친이계 동심원 바깥쪽의 의원들이 박 전 대표 쪽으로 쏠린 결과다.
이런 권력이동은 박 전 대표의 어깨를 무겁게 한다. 지금까지 '원칙'과 '신의'를 앞세워 드문드문 청와대와 친이계의 의사에 제동을 거는 것만으로도 정치적 책임을 다하는 듯했던 상황이 아니다. 어차피 착시 현상은 대선까지 1년 반 동안이나 유지되기 어렵다. 따라서 지금까지 원칙을 고수하는 것으로서 쌓아온 신의에 덧붙여 친절한 설명력을 갖춰야 한다. 복지정책에 부쩍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나 최근 이명박 대통령과의 청와대 회동 결과를 알리는 모습을 보면 박 전 대표도 자신에게 기대되는 역할 변화를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그러나 동생인 지만 씨와 삼화저축은행의 관계에 대한 차가운 대답은 의외로 불친절하다. "동생이 아니라고 했으니 그만"이라는 차갑고 단호한 언급은 "친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가 전부인 지만씨의 설명에 미루어 한참 내용이 부족하다. 앞으로 야당의 압박과 당내의 시샘이 밀어닥쳐 국민에 설명할 일이 많을 터인데, 그 정도에 흔들려서야 어떻게 믿음을 유지하겠다는 건가.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