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 15일은 갈등과 분열로 치달았던 한반도에도 협력과 화해가 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날이다. 동족에게 방아쇠를 당긴 비극을 겪으면서, 반세기 동안 대립과 반목을 이어오던 남북한의 정상이 만나 평화의 길로 나아가자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1년이 지난 지금 그런 다짐은 오간 데 없고 남북은 다시 갈등에 휘말려 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6ㆍ15공동선언의 성사를 위해 막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남북이 대결 국면을 맞은 것이 안타깝다"며 "그래도 결코 대화의 끈을 놓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박 의원과의 인터뷰는 9일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_6월 15일이 눈 앞이다. 감회가 어떤가.
"우리 국민과 전세계인의 시선이 한반도에 집중됐던 11년 전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떨린다. 당시 남북정상회담의 밀사, 특사로 움직였고 행사도 준비했으니 감회가 남다르지 않겠는가."
_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6·15선언의 의미를 이 기회에 다시 한번 이야기해달라.
"분단 반세기만에 남북 정상이 처음 얼굴을 맞댄 것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 은둔의 지도자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육성을 통해 교류, 협력, 평화를 전세계에 약속한 회담이었다. 답방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야속하지만 한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 않은가."
_어떤 성과가 있었는가.
"남북화해와 협력, 경제교류, 이산가족 상봉 등 여러 면에서 진전이 있었다."
_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한국을 향한 적대감정이 없어졌다. 과거에는 남한을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 그래서 타도의 대상으로 여겼지만, 정상회담을 통해 잘 사는 남쪽 형제로 생각하게 됐고 그 형제를 통해 우리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품었다. 남한에서 보낸 비료의 봉지와 쌀 포대를 공공연하게 집 유리창에 붙이고 시장 바구니 등으로 이용했다. 북한에 한류도 들어갔다. 김일성대학 학생들은 한국 드라마를 보지 못하면 대화가 안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사람 이름도 남한 드라마 주인공처럼 세련된 것으로 바뀌었으며 헤어스타일과 의상도 영향을 받았다."
_그러나 북한의 인권상황은 개선되지 않고 있는데.
"인권에는 두 종류가 있다. 먼저 배고프면 먹을 수 있고 아프면 치료할 수 있는 기본적 인권을 들 수 있다. 북한은 이 기본적 인권도 해결이 안돼있다. 기본적 인권의 해결에 도움을 주겠다는 것을 막는다면 결국 생명을 무시하는 일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남한에 가족을 둔 이산가족들도 고령으로 숨지고 있다. 이 사람들이 헤어진 가족과 만나는 것도 기본적 인권이다. 정치적, 사회적 인권은 그 다음이다. 북한의 인권문제를 비판하고 개선을 촉구할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는 갈등하면서도 화해와 협력을 해야 하기 때문에 지금은 기본적 인권의 개선에 도움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정치적, 사회적 인권의 개선은 북한이 개혁, 개방의 길로 나가면 많이 해결될 것이다. 중국, 베트남 같은 나라도 그러지 않나."
_6·15정상회담을 추진한 과정을 좀 회고해달라. 그 전에 남북문제를 다룬 적이 없지 않나. 어떻게 해서 그 일을 맡았나.
"문화부 장관으로 있던 1999년 말인가 2000년 1월 초에 한 호텔의 로비에서 정몽헌 현대 회장을 우연히 만났다. 그와 잠깐 이야기하다가 남북정상회담이 가능할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 문제의 중요성을 잘 몰랐기 때문에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 어느 날 김대중 대통령과 식사를 하다가 그 이야기를 꺼냈더니 한번 체크해보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임동원 국정원장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와서 나갔더니 다짜고짜 서운하다고 했다.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왜 정상회담 이야기를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대통령이 자신을 불러 '박지원 장관이 정상회담 일을 알아보고 있는데 국정원장이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느냐'고 꾸짖었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리고 국정원과 함께 정상회담의 가능성을 살피기로 했다."
_그랬더니 정상회담이 성사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나.
"2000년 2월 현대의 대북사업 파트너 요시다 다케시(吉田猛)와 만났다. 북한의 대일, 대남 사업을 하는 사람인데 아버지가 재일교포 사업가이자 북송 재일교포로 김일성 주석과 형제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요시다 다케시가 현대와 북한을 이어주고 있었다. 당시 국정원이 정상회담의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이 사람을 감청했던 것 같다. 감청을 통해 북한이 정상회담의 의지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내게 이 사람을 한번 만나라고 했다. 그런데 얼마 뒤 북한에서 갑자기 국정원?빠지라는 뜻을 전해왔다. 대신 대통령이 신임하는 사람을 특사로 보내라고 했는데 거의 나를 찍은 것 같았다."
_그 이후는 어떻게 접촉했나.
"하루는 청와대로 들어갔더니 대통령과 국정원장이 내게 싱가포르로 가 북한 인사들과 만나라고 했다. 내가 남북문제 전문가가 아니라며 박재규 당시 통일부 장관이 어떻느냐고 하자 그러면 노출 가능성이 있으니 나보고 가라고 했다. 대통령은 북측과 어떻게 협상할지를 내게 코치했다. 정상회담을 하면 이익이 되고 안 하면 손해며, 평화를 지키면 이익이고 지키지 못하면 손해라는 점을 강조하라고 했다. 손익개념으로 접근하라는 것이었다. 국정원 직원 두 명을 대동해 싱가포르에서 송호경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 등 4명과 만났다."
_그러면 정상회담에 합의한 것은 언제인가.
"싱가포르에 이어 중국 상하이에서 다시 한번 만났으며 베이징에서 4월 8일 3차 회담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하고 북한 인사들과 일본 식당에서 밤 늦게까지 폭탄주를 마시면서 서로 격려했다. 소주에 얼음을 빠뜨려 만드는 일종의 소주 폭탄주 제조법을 송호경 부위원장으로부터 그날 밤 배웠다."
_북한측과 접촉하는 과정이 외부에 알려지지는 않았나.
"베이징에서 접촉할 때는 중국 공안들이 알게 됐다. 호텔에 공안들이 들어왔다. 싱가포르에 갔을 때는 호텔에서 한국인을 만나면 그냥 휴가 차 왔다고 했다. 중국에서 돌아올 때 일부러 일반 여행자 줄에 서서 출국 심사를 했는데 나를 알아본 한국 관광객들이 '중국이 한국의 장관을 홀대한다'며 불평하는 일도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도 모포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중국에 갔다 온 사실을 안 문화부 출입기자가 중국에 다녀온 이유를 묻길래 허리가 아파 몰래 침 맞고 왔다고 둘러댔다."
_협상 과정 그리고 정상회담 과정에서 어려웠던 것이 무엇이었나.
"대통령이 누구와 상봉하고 누구와 회담을 할 지가 불분명했다. 왜냐하면 북한은 헌법상 김영남 북한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국가 원수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통령으로부터 크게 혼났다. 상봉 대상자와 회담 대상자가 다르지 않겠느냐는 질책이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평양에 갔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공항에 나왔을 뿐 아니라 남측 일행이 머물던 백화원초대소로 찾아와 회담까지 함으로써 이 문제가 말끔히 해결됐다. 당시 북에서도 말이 좀 있었던 모양인데 김 위원장이 '빨간 불(교통신호)이 켜져 있으면 새총으로 쏘아 버리고서라도 이리로(백화원초대소로) 오겠다'고 했다."
_그때 만난 김정일 위원장은 어떤 사람이었나.
"언론과 인민을 그리 많이 상대하지 않았을 텐데도 굉장히 세련됐더라. 머리 회전도 빠르고 아는 게 많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물론이거니와 나중에 그와 만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일본 총리나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 페레손 스웨덴 총리 모두 그가 스마트하고 유머러스 하다고 말했다."
_그에게서 긴장완화와 남북 화해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나.
"그렇다. 그는 긴장완화와 남북 화해만이 살 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북한의 체제와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미국밖에 없다는 생각도 확고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북한에서 가장 친미주의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래서 김 위원장이 살아있을 때 남북문제를 풀어야 한다."
_북한의 권력 세습은 어떻게 보나.
"왕조국가가 아니면서 권력을 세습하는 유일한 나라다.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비난을 할 수는 있지만 막을 수는 없다. 김정은이 권력을 세습한다고 해도 실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_얼마 전 북한이 남한 정부와의 비밀 접촉을 공개했다.
"이명박 정부가 이중성을 보인 것으로 국민을 속이고 북한이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북한과 끈을 이어가겠다는 노력은 높이 평가한다. 원래 외교에서는 테이블 아래 이야기들이 오가는데 북한이 그것을 적나라하게 공개한 것은 국제사회의 신망을 저버린 잘못이다."
_구걸, 돈봉투 같은 북한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까.
"내 경험으로 추정한다면, 우리 정부가 북한이 회담하러 오는데 필요한 항공비나 체재비를 부담하겠다고 했고 북한이 그것을 돈봉투라고 표현했을 수 있다. 또 남북정상회담의 필요성에 대한 설명을 구걸이라고 했을 가능성도 있다. 북한이 그런 이야기를 터뜨리면서 미천한 외교를 한 것인데, 앞으로 북한과 은밀한 대화를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_북한이 왜 비밀접촉을 공개했다고 보는가.
"김 위원장이 중국으로부터 후계체제와 경제지원을 보장받은 뒤 한국을 한번 찬 게 아닐까. 사실 미국이나 유럽연합(EU)도 북한에 식량 지원을 하려고 하고 심지어 일본마저도 그런 움직임을 보이는데 한국만 미동도 하지 않으니까 그랬을 수 있다. 물론 거藪〉?계산이 있을 것이다. 미국이 식량 지원을 재개하면 한국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계산 말이다."
_북한의 중국 의존은 어느 정도인가.
"전에는 북한 어선이 꽃게를 잡으면 그 다음날 바로 인천으로 들어왔다. 꽃게뿐 아니라 생선, 푸성귀 등도 들어왔다. 그것으로 저렴한 가격의 백반 식당을 운영하면 좀 어려운 사람들도 와서 먹을 수 있었다. 지금은 북한산 농식품, 수산물이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온다. 북한은 싸게 팔아 손해, 남한은 비싸게 사서 손해다. 최근에는 중국과 북한이 황금평 개발을 시작했는데 이런 게 다 중국에 대한 의존을 높이는 것이다. 북한은 지금은 가난해도 나중에는 부자가 될 수 있다. 희귀한 광물이 어마어마하다. 돈으로 환산하면 7,000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KTX, 군전차 등에 부품으로 들어가는 그 광물들이 싼 값에 중국으로 팔려나간다. 관광자원도 훌륭하지 않은가. 북한이 밉다고 중국이 이익을 가져가도록 하는 것은 옳지 않다."
_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을 평가해달라.
"이명박 대통령은 분단국가의 대통령으로서 통일에 대한 철학이 없는 것 같다. 정책이 자꾸 바뀐다. 그래서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박정희 대통령도, 노태우 대통령도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지난 10년의 화해정책을 냉전시대로 돌린 대통령이다. 하지만 늦지는 않았다. 북한이 신망을 저버려도 어른답게 받아들여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그것을 통해 평화와 교류, 나아가 통일의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자면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고 이성을 갖고 대해야 한다."
_남북의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개성공단은 가동되고 있다.
"개성공단에는 북한 종업원이 5만 명이나 된다. 개성공단 때문에 일을 하는 남한의 근로자는 12만 명, 그 가족까지 합치면 25만 명이나 된다. 우리도 큰 이익이다. 남한의 중소기업이 공장을 지어놓았지만 필요한 만큼의 북한 노동자를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약속한 것처럼 개성공단에 기숙사를 지어주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이명박 정부가 그것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 산술적으로 계산할 때 기숙사를 지어주면 북한 종업원이 10만 명으로 늘 것이고 우리 측은 가족까지 합쳐 50만 명이 먹고 살 수 있게 된다."
_천안함, 연평도 사건이 발목을 잡고 있다. 많은 사람이 이들 사건에 대한 사과를 원한다.
"대북 접촉과 이들 사건에 대한 사과를 받는 것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북한과 대화하다 보면 유감 표시가 있을 것이다."
_보수층은 6·15선언을 계기로 북한에 퍼주었더니 북한이 그것으로 핵을 개발했다고 보고 있다.
"우리가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았으면 핵 개발을 안 했을까. 북한 자체에 그 정도의 경제력은 있다."
_북핵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북핵은 기본적으로 북미간 문제다. 북한이 미국과 수교하고 체제를 보장받고 경제협력을 하면서 행동 대 행동으로 핵을 폐기하면 된다. 북한은 3차 핵실험은 하면 절대 안되며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해서도 안 된다. 남북대화를 하고 6자회담으로 돌아가야 한다."
_그렇게 되려면 미국의 태도도 중요하지 않나.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당선 후 북한에 햇볕정책을 쓰겠다고 했다가 강경으로 돌아섰지만 사실 얻은 게 없다. 전임 부시 대통령도 강경정책을 펴다가 결국 햇볕정책으로 돌아섰다. 이제 오바마 대통령의 대북정책에도 변화가 올 가능성이 있다. 미국, 일본은 물론 세계가 선(先)남북대화, 후(後)북미대화 및 6자회담 복귀를 요구하고 있으니 남북정상회담도 가능하리라 본다. 사실 내년은 전세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다. 한국은 물론 미국, 러시아 등의 지도자가 바뀌는 해이다. 북한이 강성대국을 이루겠다고 선언한 해도 바로 내년이다. 북한은 군사적으로는 이미 강성대국이 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경제문제 해결에 전력을 기울일 것이다."
■ 박지원은
1942년 전남 진도에서 태어났으며 목포 문태고와 단국대 상학과를 졸업했다. 잠시 직장생활을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1972년 동서양행 뉴욕지사 지사장에 임명됐으며 그 뒤 사업가로 성공하고 이를 발판으로 1980년 뉴욕한인회 회장이 됐다. 이후 미국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으며 1987년 6월 항쟁 이후 김 전 대통령이 정계에 복귀하자 미국 영주권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1992년 민주당 전국구 공천을 받아 제14대 국회의원이 됐으며 이후 새정치국민회의 대변인, 청와대 공보수석, 문화관광부 장관, 대통령 비서실장 등을 역임했다. 18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뒤 민주당에 복당했으며 2010년부터 1년 여간 원내대표를 맡았다. 지금은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비서실장을 겸임하고 있다.
■ 6·15에 대한 강한 자긍심… 대북송금 특검 등 곤욕의 세월도
박지원 의원의 국회의원회관 사무실 번호는 615호다. 2008년 전남 목포에서 제18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의원회관에 들어갈 때, 남북정상회담의 성사를 위해 막후에서 뛰었던 사람으로서 6·15 정신의 계승과 확산을 다짐하면서 그 방을 선택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방은 비어 있었다. 그의 홈페이지 주소(http://www.jwp615.com)에도, 이메일 주소에도 615가 들어있다. 그는 그만큼 남북정상회담과 6·15선언에 애착이 강하다. 박지원 의원은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저는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대단한 자긍심을 갖고 있습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그가 남북정상회담의 영예만 누린 것은 아니다. 정권이 바뀐 뒤 얼마 되지 않아 대북송금 사건에 연루돼 곤욕을 치렀기 때문이다. 그는 2003년 대북송금 특검이 실시되자 북한에 4억5,000만달러를 불법 송금한 사건에 연루돼 그 해 6월 특검팀에 긴급 체포, 구속수감됐으며 2심에서 남북교류협력법 위반, 뇌물수수, 알선수재 등의 혐의로 징역 12년에 추징금 147억5,200여만원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대법원이 2004년 11월 그가 현대비자금 150억원을 수수한 혐의에 무죄 취지의 파기환송을 결정했고 2006년 5월에는 서울고법이 파기환송심에서 대북 불법송금과 대기업 자금 1억원 수수에 대해서만 유죄를 인정하고 징역 3년형을 선고함으로써 법정 공방이 마무리됐다. 그는 수감돼 있는 동안 녹내장이 악화되는 등 육체적 고통을 겪기도 했다.
당시 대북송금 특검을 놓고 일부에서 남북 대화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는다거나, 6·15선언의 본질을 훼손한다는 등의 비판을 제기하면서 여론이 분열됐으며 남북정상회담을 처음 제안한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 투신자살하는 비극적인 사건도 일어났다.
인터뷰=박광희 편집위원 =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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