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드러나지 않게 일하는 곳인데 50주년 행사를 한다고 밖에 알리겠느냐."
10일로 창설 50년을 맞는 국가정보원 관계자의 말이다. 국정원의 지난 반세기는 파란만장했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옛 중앙정보부 시절 부훈(部訓)이나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이라는 지금 원훈이 상징하듯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국가 안보와 국가이익을 위해 일해야 하는 게 그들의 '숙명'이자 '사명'이다.
국정원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뚜렷이 엇갈린다. 국내외 정보를 수집하면서 국가안보의 파수꾼 역할을 하고, 남북관계에서 막후 역할을 한 것은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반면 도청과 불법 사찰 등을 통해 국내 정치에 개입하거나 인권을 침해한 사례 등은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국정원의 모태인 중앙정보부는 5ㆍ16 군사쿠데타 직후인 1961년 6월10일 쿠데타의 주역인 박정희 소장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졌다. 김종필 전 총리가 초대 수장을 맡은 중앙정보부는 안보를 위한 정보 수집 활동을 창설 목표로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군사정권 유지에 신경을 썼다. 이 같은 태생적 한계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이 중정이 주도한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이었다.
김재규 전 부장의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으로 조직 창설 이후 최대 위기를 맞기도 했던 중앙정보부는 국가안전기획부(1981~98년)와 국가정보원(1999년~)으로 문패를 바꿔 달았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부 등 군사정권을 거치는 동안 중정은 줄곧 정치 공작에 개입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민간 정권인 김영삼∙ 김대중 정부에 들어와서도 국정원은 종종 사찰 및 도청 논란 등에 휩싸이기도 했다. 안기부의 '미림팀'에 의한 도청 사건으로 국정원은 2005년 사상 초유로 검찰로부터 압수수색을 당하는 수모를 감내해야 했다. 최근에는 국내 분야 정보수집 활동의 문제는 별로 부각된 적이 없지만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 침입 사건 등 미숙한 대외공작이나 대북(對北) 정보력 부재가 도마에 올랐다. 김재규 전 부장을 비롯한 역대 수장들의 험한 말로는 국가정보기관의 험난했던 과거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국정원 역사에 부정적 유산만 있는 것 아니다. 국정원은 북한 관련 및 국제 정보는 물론 대공∙방첩∙테러∙사이버∙국제범죄∙산업기밀 등 국내 보안정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정보를 수집하면서 국가안보 대책을 마련해 왔다. 또 남북 대화의 역사에서도 국정원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 이후락 전 중정 부장은 1972년 5월'대북 밀사'로 평양에 가 김일성 북한 주석과 사상 첫 남북비밀회담을 가졌고 '7.4 남북 공동성명'을 성사시켰다. 1980년대 후반 국정원은 북방 외교를 지원했다. 2000년과 2007년 제1, 2차 남북정상회담 준비 및 진행 과정에서도 막후 대화 채널 역할을 했다. 새로운 반세기를 시작하는 국정원은 빛과 그림자의 경계선에 서 있다.
김성환기자 bluebir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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