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정말 잊을 수가 없어요. 이한열 학생 영결식이 열린다는 소식에 모두 약속한 것처럼 연세대 교정으로 몰려들었죠. 학생뿐 아니라 신촌 일대 가게 주인들도 다 문을 닫고 시청광장까지 걸어서 추모행렬에 동참했어요. 아현고가도로를 가득 메운 시위대가 목이 터져라 독재타도를 외쳤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문선경(67)씨는 아직도 1987년만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군부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대학생들은 민주화를 열망하며 연일 시위를 이어갔고, 그 해 6월9일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이던 이한열 학생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면서 시위는 더욱 거세져 6ㆍ10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78년부터 연세대 앞에서 '논지당'이라는 카페를 운영하며 신촌 일대 대학생들의 큰 누님, 큰 언니로 살아온 세월만 33년, 문씨는 희뿌옇던 화염병 연기 속으로 사그라져간 학생들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곤봉과 방패로 무장한 경찰에 의해 만신창이가 돼 돌아오는데 도대체 이 착한 학생들이 뭘 잘못했길래 이런 험한 일을 당하나 싶어 너무 화가 나고 억울했죠."
마음 속 분노는 평범한 아줌마였던 문씨를 학생들의 든든한 지원군으로 만들었다. 학생들은 시위에 나서기 전 문씨의 가게에 들러 무거운 책가방을 벗어 던지고 든든하게 배를 채운 후 '전투'에 나섰다. 문씨가 운영하던 또 다른 가게였던 세란카페(세브란스병원 앞 글자를 땄다)는 '세란여관'이라 불릴 만큼 시위대 학생들에게 믿을 수 있는 은신처로 제공됐다.
문씨는 학생들에게 진 '빚'을 갚고 싶었다고 했다. "그 학생들이라고 왜 무섭지 않았겠어요. 당장 어디론가 끌려가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잡혀갔다 풀려나면 또 다시 시위하러 나가더라고요. 친구들도 고생하는데 혼자 빠질 수 없다고, 또 이래야지 모두가 살 수 있다면서 말이죠."
문씨는 자식뻘 되는 학생들이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모습을 보고 그간의 삶을 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내 남편과 아들이랑만 잘 먹고 잘 사면 되는 거 아닌가 했거든요. 원래는 명동에서 장사하다가 대학 앞이 더 잘될 것 같아 신촌으로 온 건데, 만약 신촌에서 장사를 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나만 아는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겠죠."
문씨는 학생들을 스승이라고 불렀다. 학생들은 논지당에 모여 정치 사회 문제를 토론했고 문씨도 어깨너머로 귀동냥을 했다. 문씨가 원래 가게 이름(마이하우스)을 버리고 83년부터 논지당(論志堂)이라는 간판을 새로 내걸었다. "학생들이 학교 행사가 있을 때마다 매번 초대해줘 연대에 들어갈 일이 많았거든요. 제 눈에 가장 예뻐 보였던 건물이 바로 여학생휴게실 건물로 사용되던 '논지당'이었어요. 제가 진짜 여대생은 아니지만 함께 뜻을 논의하고 공유하고픈 마음에 이름을 빌렸죠."
문씨는 학생들 덕분에 여고 졸업 이후 가까이 하지 않던 책도 읽고 신문도 보면서 세상 돌아가는 일에 부쩍 관심을 갖게 됐다. 90년대 들어선 여성환경운동시민단체에서 따로 활동할 정도로 적극적인 시민으로 변했다.
어느덧 패기 넘치던 20대 학생들은 한 가정을 꾸리는 아버지로, 또 어머니로 변했지만 논지당을 향한 애정은 여전하다. 영화제작자 서현석(연세대 철학과 75학번)씨는 "부인과 결혼 결정을 내릴 때도 누님을 찾았을 만큼 믿고 의지하는 분"이라며 "논지당은 7080운동권 세대의 인생복덕방"이라고 평가했다.
문씨는 "시위대 선봉에 섰던 사람들도 40, 50대 되면 사는 게 힘들어서 그런지 예전만큼 사회 참여를 이어가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더라"며 "그래도 논지당에 와서 젊은 시절의 열정을 한번 더 떠올리고 간다고 하니 위안을 삼는다"고 했다.
10일 6ㆍ10민주항쟁 24주년을 앞두고 대학생들이 대규모 반값등록금 촛불집회를 연다고 하자 문씨는 반가워했다. "요즘 대학생들은 불안정한 미래 때문에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것 같은데, 사회문제에 무관심하다 보면 당장은 이로울 것 같아도 멀리 보면 모두 다 불행해져요. 6ㆍ10민주항쟁의 선배들처럼 목소리를 내고 참여해야만 세상은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답니다."
강윤주기자 k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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