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전인 1987년 6월10일 오후 6시 서울 중구 정동 대한성공회 대성당과 전국 20여 도시에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은폐ㆍ조작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가 열렸다. 한국 현대사의 전환점인 '6월 항쟁'의 공식 출발점이다. 그러나 공식 대회 시간에 30분쯤 앞서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가두시위는 '6월 항쟁'의 시작을 일찌감치 알렸다. 서울에서만 2만4,000여 경찰이 아침부터 대회장인 성공회 대성당과 주요 집결지 주위를 에워싸는 등 전국에서 6만 경찰이 원천봉쇄에 동원됐지만 대회와 시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이튿날 아침 한국일보 1면에는 '6ㆍ10 시위 2,673명 연행'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전국 20개 시서 3만9,000명 참가, 80개대서 출정식, 도심상가 철시, 김영삼 총재 등 민추협서 철야농성'등의 작은 제목이 뒤따랐다. 2면과 10면, 11면도 관련기사로 채웠다. 검열에 가까운 '보도지침'이 살아 있던 당시 12개면 가운데 사실상 4개 면을 썼으니 얼마나 시위의 여파가 예사롭지 않았던지 짐작하고 남는다. 연일 거듭된 전국적 시위는 '넥타이 부대'의 동참을 이끌었고, 결국 '6ㆍ29 선언'이란 권력의 항복을 받았다.
■ 6월 항쟁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상징하듯 정치적 민주화의 달성에 그치지 않았다. '6ㆍ29 선언'에 이어진 7월과 8월의 '노동 대투쟁'을 통해 한국 사회에 처음으로 진정한 노동자 권리가 꽃을 피우는 등 사회ㆍ문화 전반의 패러다임 전환을 불러왔다. 6월 항쟁을 '한국형 시민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넥타이 부대'의 참여를 불러 시민혁명의 모양을 갖추었지만, 그 시작은 학생과 저항 정치세력의 연대였다. 따라서 전위적 소수의 활력이 궁극적으로 거창한 역사 변화를 이끈 실례이기도 하다.
■ 당시 학생운동에 대한 사회적 신뢰는 대단히 두터웠다. 민주화 요구를 비롯한 그들의 주장은 특유의 도덕적 정당성 덕분에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충분했다. 도덕적 정당성의 원천은 다름아닌 자기 희생이었다. 그들의 주장이나 요구의 합리성에 공감하지 않더라도, 공공의 이익을 위해 체포와 구금, 생명의 위협까지 무릅쓰는 용기는 아름다울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세상이 참 많이도 바뀌었다. '무조건 반값 등록금'을 위해 대학생들의 동맹휴업과 시위로 이뤄질 '6ㆍ10 대회'는 24년 전에 빛났던 공익이나 자기희생의 흔적조차 희미해졌으니.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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