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문 벽 때리던 물, 9부 능선서 멈춰…선조 지혜가 후손 살렸다
일본 사상 최악의 재난으로 기록될 도호쿠(東北) 대지진을 두고 일본 내에서는 규모나 피해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의미에서 '상정외(想定外)'로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일본의 대표적인 해안절경 리쿠주(陸中) 해안국립공원 내에 위치한 이와테(岩手)현 오쓰치(大槌), 야마다(山田)시, 미야기(宮城)현 게센누마(氣仙沼) 등 3개 도시는 이번 쓰나미로 도시 전체가 사라졌고, 수만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는 등 최악의 피해를 입었다.
반면 인명피해가 거의 발생하지 않은 지역도 있다. 이와테현 후다이무라(普代村), 미야코(宮古)시 아네요시(姉吉)마을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마을의 공통점은 조상들의 부정적 조언을 귀담아 듣고, 쓰나미에 대해 평소 철저한 대비를 해왔다는 것이다. 경험을 믿고, 과도한 낙관을 경계하라는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블랙스완에 대비한 전략에 꼭 들어맞는 사례이다.
이와테현 후다이무라는 북위 40도에 위치한 인구 3,000여명의 자그마한 어촌이다. 기암괴석과 그에 어우러진 후다이하마 해수욕장을 끼고 있고, 리쿠주 지역 해안절경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쿠로사키 전망대와 기타야마자키를 잇는 교통요충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 이 마을은 쓰나미로부터 주민들을 지켜낸 높이 15.5m의 수문과 방파제로 새롭게 관심을 얻고 있다. 일본 언론은 이를 '후다이의 기적'이라고 부르고 있다.
후다이로 향하기 위해 리쿠주 해안국립공원의 북단이자 기타산리쿠(北三陸)철도의 기점인 구지(久慈)시에 도착했다. 이 곳에서 후다이무라를 거쳐 미야코시까지 이어지는 철도의 길이는 70㎞가량. 하지만 도호쿠 대지진으로 철로와 교량 100여 군데가 파괴됐고, 철도역도 상당수 침수된 까닭에 노다-후다이무라 구간 운행철도는 멈춰선 상태다. 발길을 돌려 하루 4차례 왕복하는 임시 버스를 이용, 겨우 마을에 다다랐다.
후다이무라 수문에 도착하니, 당시 쓰나미의 위력을 엿볼 수 있는 흔적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평소 미역양식장으로 조성된 가설 철조 건물이 쓰나미에 휩쓸려 완전히 망가졌고, 쓰나미에 대비해 마을 주민들이 조성한 송림엔 뿌리째 뽑힌 흔적들만 남았다.
반면 해안에서 300m 지점에 위치한 수문은 거뜬했다. 당시 열려있던 수문을 수동으로 닫은 뒤 피신했던 구지소방서 후다이분소 타치우스 마사루 부소장은 "수 차례에 걸쳐 수문 벽을 때리는 굉음이 들렸으나 쓰나미는 9부 능선에서 멈췄다"며 "수문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초ㆍ중학교와 단층 짜리 신축주택단지가 있었기 때문에 쓰나미가 수문을 넘었다면 엄청난 인명 피해가 생겼을 것"이라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수문 인근 방파제 앞 해안가에 있던 어장도 쓰나미에 휩쓸려 자취를 감췄으나, 방파제 너머에 위치한 1,500여 주민이 거주하는 집단 촌락의 피해는 전무했다.
후다이무라의 방파제(길이 155m)는 1967년, 수문(길이 205m)은 1984년 완공됐다. 높이는 모두 15.5m로, 와무라 유키에 당시 촌장(작고)이 강력하게 주장한 끝에 조성됐다. 공사비용은 36억엔이었는데, 인구 수천명의 마을 치고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언제 올 지 모르는 쓰나미 때문에 비싼 비용을 치르는 것은 예산낭비다" "차라리 마을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게 낫다"는 등 주민들의 반발이 빗발쳤다. 하지만 와무라 촌장은 "우리 마을엔 1896년 15m 높이의 쓰나미에 1,010여명이 목숨을 잃었고, 1933년에도 600여명이 희생된 아픈 과거가 있다. 두 번은 당했지만 세 번씩 쓰나미에 질 수는 없다"며 주민설득에 나섰고, 결국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후카와타 히로시 촌장은 "당시 선박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 어장으로 내려갔던 주민 한 명이 행방불명된 것을 제외하면 단 한 명의 부상자도 없다"며 "후손들의 목숨을 살린 그의 결단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아네요시 마을은 기타산리쿠 철도의 종착역인 미야코시 오모에(重茂)반도 동단에 자리잡은 인구 40여명(12세대)의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의 해발 60m 정도 지점에 "후손들은 이 곳보다 낮은 곳에 거주하지 말라"는 표석이 서있는데, 주민들은 이 경고에 따라 표석보다 높은 곳에 집을 짓고 살고 있다.
대지진 당시 마을 아래 어장에서 일하던 한 주민은 "거센 속도로 다가오는 쓰나미를 피하기 위해 언덕을 거슬러 뛰기 시작했는데, 신기하게도 표석 50m 앞에서 쓰나미가 멈췄다"며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표석의 교훈을 새삼 깨달았다"고 전했다.
미야코시의 대표적인 해안절경으로 명승지로 지정된 조도(淨土)가하마 해변앞에도 "지진이 발생하지 않아도 파도가 갑자기 뒤로 물러날 경우, 쓰나미가 닥치는 것이니 높은 곳으로 대피하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극락정토를 의미하는 이 해안풍광을 감상하다가 화를 입은 과거의 경험을 후손들이 잊지 말라는 당부이다. 이 곳에서도 해변 앞에 있던 선착장과 레스토랑 등 일부 건물이 손상됐으나 관광객들이 재빨리 피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할머니 코끼리의 부정적인 조언을 귀담아 들으라는, 즉 블랙스완에 대비하라는 교훈을 이 지역 주민들은 오래 전 이미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후다이·미야코(이와테)=한창만특파원 cmhan@hk.co.kr
■ 모두가 믿었던 '日 만리장성' 다로 방파제는 37.9m 파도 못 당해…
후다이무라의 수문과 방파제 조성이 추진될 당시 반대론자들은 이와테현 미야코시 다로(田老)마을에 위치한 방파제의 예를 들며 거센 반발에 나섰다. 해안가와 마을 앞을 이중삼중으로 막고 있고, 길이만 2,433m에 달해 '일본의 만리장성'으로 불리는 다로 방파제의 높이가 10m인데도 이보다 높은 방파제가 과연 필요하겠냐는 것이 요지였다. 당시 전문가와 언론도 일본을 쓰나미로부터 지켜줄 최후의 보루로 늘 이 곳을 빼지 않고 언급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 방파제는 쓰나미로부터 주민을 지켜내지 못했다. 오히려 방파제를 과신한 탓에 대피가 늦어져 인명피해가 늘어나는 원인이 됐다는 지적까지 제기되고 있다. 후다이무라의 수문과 아네요시의 표석이 주민을 지켜낸 것이 선조의 조언을 중시한 결과라면, 다로 방파제는 전문가의 데이터를 맹신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미야코시에서 기타산리쿠 철도를 이용해 도착한 다로마을은 그야말로 폐허 그 자체였다. 바다 위에 조성된 방파제는 쓰나미에 모두 부서진 채 수면아래로 사라졌고, 듬성듬성 보이는 돌덩이들만이 이 곳이 과거 방파제였음을 짐작케 했다.
해안가 마을앞에 설치된 2중 방파제의 위용은 명성 그대로 거대했다. 쓰나미의 공격으로 군데군데 부서진 흔적이 있지만, 방파제 전체를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문제는 높이였다. 도쿄대 지진연구소에 따르면 이번 도호쿠 대지진 때 다로지역의 쓰나미 높이는 최고 37.9m. 당시 쓰나미는 2중 방파제를 넘어 이 일대 마을을 초토화시킨 뒤 수백m 떨어진 3중 방파제까지 삼켰다. 결국 쓰나미로 주민 100여명이 사망했고, 주택 1,500여채가 붕괴됐다. 항구에 있던 어선 500여척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고가 발생한 지 석 달이 다 되도록 방파제가 둘러싸고 있던 마을은 초대형 쓰레기 더미로 뒤덮여 있어 복구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다.
당시 쓰나미를 피해 산중턱까지 피신했던 주민 다이보 겐사쿠씨는 "마을 주민들을 지켜주리라고 믿었던 방파제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줄 몰랐다"며 "수십년간 함께 해온 집과 어선이 한순간에 사라졌다"고 회고했다.
미야코시 남부 해안에 위치한 가마이(釜石)의 방파제도 전문가의 예측을 빗나가게 한 대표적 피해사례로 손꼽힌다. 2009년 3월 가마이시 앞바다에 설치된 이 방파제는 해저 63m깊이에 만들어져 가장 깊은 해저 방파제로 기네스북에 등재돼 있다. 길이 1,960m, 수면위 높이 8m의 이 방파제는 수면에서 발생하는 파도와는 달리 심해에서 더 큰 파도가 형성되는 쓰나미의 특징을 감안해 해저부분을 깊게 조성했다. 사용된 돌 부피는 700만㎥에 달하며 공사기간만 31년이 걸렸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 곳에서도 쓰나미의 높이를 간과했다. 그 결과 쓰나미는 수면위에 솟은 방파제 대부분을 파괴시킨 뒤 마을을 덮쳤다. 결국 내로라하는 예측자의 잘못된 판단에 마비된 주민들은 모든 가능한 경우를 대비하지 못했고, 수백명이 귀중한 생명을 잃었다.
다로(이와테현)=한창만특파원 cm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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