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빈곤의 수렁, 송두리째 삶을 삼키다
동대문에서 의류도매업체를 운영했던 최모(47)씨는 외환위기가 절정에 달했던 1999년 초 거래처의 어음이 부도나면서 돈줄이 막혀 사업장을 송두리째 날렸다. 사장 소리를 듣던 그는 채무를 갚지 못해 금융채무불이행자(옛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그가 갖고 있던 채무는 1,100여만원. 그러나 돈벌이가 없어지면서 채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이자가 원금보다 4배 가량인 4,000만원대로 뛰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상환독촉이 이어지면서 아내와도 갈등을 겪다 이혼했다. 이후 최씨는 자녀를 동생에게 맡겨둔 채 전국 건설현장을 전전했다. 돈을 버는 족족 빚을 갚는 데 썼어도 상환액은 600만원에 미치지 못했다. 그는 "한번 떨어진 나락에서 헤어나오기가 이렇게 힘들지는 몰랐다"고 하소연했다.
90년대 후반 예상치 못한 사이에 불어 닥친 외환위기는 하나의 '블랙스완'이었다. 혹독한 구조조정으로 한 순간에 직장을 잃은 사람만도 무려 150만명. 이들의 가족 등 간접적인 영향까지 합하면 1,000만명 이상이 외환위기의 희생자라는 추정도 나왔다.
이로 인해 '일만 열심히 하면 잘 살 수 있다'는 공식은 처절하게 무너져 내렸다. 경쟁력 제고라는 명목으로 기업은 상시 구조조정이 가능하게 되면서 고용안정성은 사라졌고, 일용직과 계약직이라는 형태의 채용이 일상화됐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가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빈곤층은 늘어났다. 2000년대 중반 세계 경제가 살아나면서 다시 부흥을 꿈꾸었지만, 2008년 미국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촉발된 또 하나의 블랙스완, 글로벌 금융위기는 또다시 서민들을 강타했다.
베이비붐 세대인 이모(52)씨가 그런 경우다. 잘 나가는 의류업체 관리직이던 이씨는 외환위기로 회사가 흔들리자 명예퇴직했다. 퇴직금과 은행에서 빌린 돈으로 호프집을 창업했으나, 외환위기 이후 '한푼이라도 아끼자'는 분위기가 확산된 탓에 매출이 부진했다. 게다가 거래처에 사기까지 당해 유일한 생계수단이던 호프집마저 폐업했다. 이후 각종 아르바이트는 물론 건설일용직 등 닥치는 대로 일했으나 겨우 이자만 갚는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급기야 세계 금융위기 여파로 건설 경기가 침체되면서 일거리는 줄었고, 결국 지난해 3월 채무불이행자가 됐다. 지금은 대리운전으로 버는 월 100여만원이 수입의 전부다.
10년에 걸친 두 번의 블랙스완은 우리 사회에 소득 양극화의 고착화라는 치명적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경제는 물론 교육, 문화 등 거의 전 영역에서 불평등으로 연결, 결국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는 악순환을 야기하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91년부터 2010년까지 20년간 소득 상위 20%의 월 소득은 3.3배가 증가한 반면 하위 20%는 2.3배 증가하는 데 그쳤다. 특히 하위 20%가 월 소득을 2배로 올리는 데 17년이 걸린 반면, 상위 20%는 이 기간 소득을 3배로 끌어 올렸다. 91년 150여만원 수준이던 이들 간 소득격차는 2010년 580만원에 달했다. 외환위기 직전인 97년 90만9,967원이었던 하위 20%의 월 소득은 그 수준을 회복하기까지 4년이 걸린 반면, 상위 20%는 2년만에 회복했다. 위기가 빈곤층에 더욱 가혹했다는 방증이다.
베트남전 참전 용사로, 외환위기 전까지 조경업체를 운영하며 승승장구했던 구모(78)씨. 외환위기로 사업이 부도나면서 집까지 팔아가며 빚을 갚았지만 부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노숙자가 됐다. 그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곳은 서울의 한 노숙자 쉼터. 노령연금 월 9만원과 참전용사 수당 월 8만원, 공공근로 등 일용직으로 그가 만지는 돈은 한달에 60만원 안팎에 불과하다. 아직까지 변제하지 못한 660만원을 갚는 게 노령인 그의 마지막 소원이다.
제는 세계 금융위기는 언제든지 우리나라를 덮칠 수 있다는 것. 대외 의존도가 80%가 넘는 우리 경제 상황은 언제나 이러한 대외적인 위험성이 내재돼 있다. 현재도 유럽 재정 위기와 국제 식료품값 급등, 중동 불안은 언제든지 우리 경제에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불안 요인.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대외 위기가 가져올 충격을 최소화하고 부작용을 완화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사회에서 패자로 밀려난 사람들을 끌어 안고 부활의 기회를 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 윤석헌 숭실대 교수는 "금융안전망과 사회안전망을 충실하게 만들어 피해를 흡수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대혁기자 selected@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