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민혁명으로 찾은 봄, 이제 "일자리"를 외치다
지난해 12월 17일 북아프리카의 작은 도시에서 한 젊은이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을 때, 그것이 10억 무슬림의 가슴을 타오르게 하리라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이슬람과 민주주의라는 두 가치체계가 격렬하게 뒤섞이는 풍경은 재스민 혁명의 불길이 두 대륙에 넓게 번진 지금도 여전히 낯설다. 지난달 24일, 그 발화점인 튀니지 시디부지드를 찾아갔다. 불꽃은 경제적 욕구를 연료 삼아 아직 너울거렸다.
시디부지드는 수도 튀니스에서 남쪽 사하라 사막을 향해 자동차로 4시간 가까이 가야 하는 거리에 있었다. 밀과 올리브 경작지가 황무지와 겹쳐지는 변경. 쾌적한 지중해 대기가 시디부지드에 가까워질수록 건조해졌다. 푸석한 건물과 포장이 뜯겨나간 도로가 내륙 주민의 곤궁한 삶을 어렵잖게 짐작하게 했다. 그런데 도시를 30km 가량 앞둔 젤마라는 마을에서 일단 차를 세워야 했다.
"어디로 가는가?"
외국인을 태운 차량을 보자 흥분한 주민들이 몰려왔다. 이들은 시디부지드로 향하는 길목에 타이어를 쌓아 놓고 불을 지른 뒤 시위를 하고 있었다. 혁명 이후에도 달라진 것 없는 살림살이에 불만이 고조돼 있었는데, 전날 7명의 과도정부 각료가 시디부지드를 찾아 허울좋은 지원책을 쏟아놓은 것이 이들을 폭발케 했다. 젤마 주민들은 언론이 시디부지드에만 관심을 쏟는 통에 자신들이 소외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기 기술자 모라드 하세이니(39)는 이렇게 말했다.
"공장도 없고 일자리도 없다. 독재자의 식솔들이 하던 짓을 이제는 부아지지의 가족이 하고 있다. 트라벨시 일가(축출된 벤 알리 대통령의 처가)가 빼앗아갔던 땅을 부아지지 가족이 차지했다."
시디부지드에서 과일 노점상으로 일하던 모하메드 부아지지는 경찰의 폭력적 단속에 항의하며 분신, 이슬람세계 민주화의 불길을 당긴 재스민혁명의 아이콘이다. 그러나 튀니지 내에서 그에 대한 여론은 곱지 않았다. 사람들은 잇단 이기적 행동으로 결국 시디부지드에서 쫓겨난 부아지지 유족의 탓을 하기도 했지만 혁명 이후에도 개선될 기미가 안 보이는 경제상황과 치안 부재가 보다 큰 원인으로 보였다.
"부아지지? 그는 아랍 세계 전체에 골칫거리를 만들었다. 예전에는 그나마 밤에 길거리를 마음껏 다니기라도 했는데 이제 그것도 못하게 됐다. 내 친구들은 모두 실업자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일자리다."
시디부지드로 들어서서 퀭한 눈으로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압둘 하미드 카드라우(26)라는 청년에게 말을 붙였다가 들은 대답이다. 옆에 있던 잘흐드 부지디(42)도 "내 주변의 80%는 놀고 있다"고 했다. 페인트공인 그는 반년 넘게 일을 못해봤다. 부아지지가 몸에 기름을 끼얹은 차도에 면한 도청 정문에는 A4용지 크기의 종이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청년들이 항의의 뜻으로 붙인 졸업장과 이력서다.
끓어오르는 경제적 욕구가 위험수위에 이른 것은 시디부지드만의 일이 아니다. 튀니지의 공식 실업률은 14% 정도지만 청년층의 체감 실업률은 50%에 육박한다. 혁명 여파로 인한 폭발적 임금 인상은 실업자들의 소외감을 심화시키고 있다. 월 3,800달러 정도이던 임금노동자의 월평균 급여는 혁명 후 5,000달러 수준으로 뛰어오른 것으로 집계된다. 앗싸베하신문 기자 칼릴 하네시(31)는 "치안 불안보다 인플레이션이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인텔리 계층일수록 미래를 밝게 전망했다. 그들은 현재의 불안과 결핍을 인정하면서도 혁명에 대한 자긍심을 잃지 않고 있었다. 시디부지드 시내에서 브뤼셀의 생화학 연구소 연구원 라바 하질레위(59)를 만났다. 이곳 출신으로 3년 전부터 벨기에와 튀니지를 오가며 살고 있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사람들은 빨리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 것을 답답해하고 힘들어 한다. 그러나 기다려야 한다. 나는 나라가 안정될 때가지 7~8년 걸릴 거라고 생각한다. 아랍국 시민들은 본래 수준이 높지만,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해 혼란스러운 과도기를 겪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혁명이 완성되리라 확신한다. 예전엔 이 궁벽한 시골 출신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지만, 이젠 어딜 가도 자랑스럽다."
도시를 한 바퀴 둘러보고 나오는데 군부대 앞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하루 전(23일) 부아지지처럼 두 번째 분신을 한 미스마 옴므리(19)의 언니 사라 옴므리(28)가 군인들에게 거칠게 항의하고 있었다. 미스마는 부대에서 허드렛일 자리라도 얻으려다가 모욕을 받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격앙된 주민들의 분위기에 눌려, 군인과 경찰들이 주춤대고 있었다. 불과 반년 전까지 폭압적으로 군림하던 모습에 비하면 지나치게 무력해 보였다.
어린 동생과 함께 픽업 트럭에 과일을 싣고 팔던 파트히 벤 사앗(21)이 말했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혁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10년이 걸릴 수도, 20년이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린 끝내 이길 것이다."
시디부지드(튀니지)= 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 "페이스북이 없었더라도 혁명은 일어났을 것"
장갑차와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독재자의 친위대를 무너뜨린 무기가 페이스북이라는 사실은 재스민혁명이 지닌 가장 드라마틱한 요소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2008년 콜롬비아 반군의 인질납치 반대 운동, 2010년 아이티 지진 기부금 모금 등에서 이미 사회적 도구로 활용된 적이 있다. 그러나 SNS가 유혈 진압을 뚫고 정권교체를 이루는 수단이 되리라고는 그것을 설계한 이들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지난 세기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음을, 재스민혁명은 보여준다.
혁명이 시작된 튀니지의 페이스북 이용률은 90%에 이른다. 퓌블리네(publinet)라고 부르는 PC방에 가보면 젊은이들이 십중팔구 페이스북을 하고 있다. 만하르대학 부르기바언어학교 학생 아흐메디 제흐리(21)는 "튀니지엔 포털 사이트가 없고 마땅한 오락거리도 없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대부분 페이스북을 한다"며 "이번 혁명도 SNS을 통해 실시간으로 정보를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축출된 벤 알리 전 대통령은 1월 13일 오후 8시 정각 "더 이상 재임하지 않겠다"며 사실상의 항복선언을 했는데, 가장 먼저 취한 조치가 5분 뒤 유튜브 사이트 차단을 해제한 것이었다.
이집트에서 무바라크 30년 독재를 몰아낸 일등 공신도 '우리는 모두 칼레드 사이드'라는 페이스북 페이지였다. 지난해 6월 알렉산드리아에서 경찰 폭행으로 사망한 칼레드 사이드를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페이지는 무바라크 정권의 실정과 폭력을 전하며 반정부 운동을 이끌었다. 이후 이 페이지의 운영자가 구글의 임원인 와엘 고님으로 밝혀지면서 그는 재스민 혁명의 또 다른 상징이 됐다. 무바라크 정권은 시위가 격화됐던 1월 말 인터넷과 휴대전화 서비스를 이틀 동안 중단했으나 흐름을 되돌리는 데 실패했다. 이집트 법원은 28일(현지시간) 통신을 끊은 데 대한 책임을 물어 9,000만달러의 벌금을 무바라크 등에게 부과했다.
그러나 혁명 성공의 원인을 페이스북에서만 찾는 데 대한 비판도 없지 않다. SNS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부터 점증돼 온 민주화 노력이 간과될 수 있고, 지난한 '혁명 이후'가 손쉬운 작업일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튀니지의 세속주의 정당인 정의개발당의 라델 아델라 무뗀미아 사무총장은 "페이스북이 없었더라도 혁명은 일어났을 것"이라며 "페이스북을 통한 혁명이었을 수는 있겠지만, 페이스북 혁명이라고 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수도 튀니스 중심가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카스비 칼레드(48)도 "시위 현장에서는 주로 젊은이들이 눈에 띄었지만 국민 모두가 참여한 혁명"이라며 "페이스북 혁명이 아니라 튀니지 혁명이라 부르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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