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어려워서 부모님이 밥이라도 굶지 말라고 남의 집 식모로 보냈어. 하루는 물을 길러 갔다가 서커스에 한눈을 팔아 해가 지도록 물을 하나도 못 뜬 거야. 혼날까 무서워 그 길로 집을 나왔는데, 나쁜 친구를 만나 미군 클럽에 팔려왔지. 그게 열여섯이야."
7일 오후 미군부대가 있어 '기지촌'이라 불리는 경기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의 햇살사회복지회. 엄모(64) 할머니는 두 젊은이를 앞에 두고 묵은 기억을 덤덤하게 꺼냈다. 뒤죽박죽 두서 없는 얘기였지만 3시간동안 잠시도 끊이지 않았고, 내용에 따라 할머니는 목소리를 높였다가, 웃었다가 했다.
특히 미국으로 입양 보낸 아이에 대한 사연이 길었다. "집을 옮길 때마다 방을 하나씩 더 뒀어, 혹시 날 찾아올까 봐.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애가 찾는단 전화를 받자마자 서울에 갔다가 간첩으로 몰려 경찰서에 간 적도 있었지. 기지촌에 살면 외부 생활을 잘 몰라서 거동수상자로 오해 받았던 거야."(웃음) 당시 많은 기지촌 여성들은 '김일성이 남한에 오면 제일 먼저 혼혈아를 죽인다'는 소문에 아이를 입양 보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이날 기지촌 여성들의 쉼터인 햇살사회복지회에서는 과거 미군들을 상대했던 할머니들의 일생을 채록하는 '기지촌 할머니들의 생애사 다시 쓰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경기도여성발전기금으로 중앙대 이나영(사회학) 교수가 지도하는 작업은 할머니들이 자신의 아픔을 말하면서 치유 받고, 주류역사에서 소외된 이야기를 공적으로 기록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실제 복지회에서 지난 2월부터 매주 할머니들의 자기소개 자리를 마련했는데, 이후 할머니들의 표정이 한결 밝아지고 말수도 늘었다고 한다.
첫 날인지라 할머니들은 괴로운 기억을 별로 내비치지 않았다. 미8군 정보에 따르면 1960년대 국민총생산(GNP)의 4분의 1을 벌어들인 기지촌 여성들을, 당시 정부는 '애국자'라고 추켜세웠지만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자리에서였다. 순결을 강조하는 가부장제도가 엄했던 시절이라 실상은 조용히 입을 닫고 사는 것이 편했을 터. 채록자들도 힘든 질문은 하지 않았다. 횟수를 거듭하면 이야기는 자연히 더욱 깊어질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나영 교수는 기지촌 할머니들을 미군 '위안부'라고 명명했다. 많은 이들이 "자발적이다"는 이유로 일본군 위안부와 차별을 두지만, "기지촌 여성 또한 정부 주도의 성매매 시스템 위에 이식된 군사주의 문화, 해방과 전쟁을 통해 증폭된 가난이 낳은 희생자"라는 것이다. 이번 생애사 채록 대상이 된 8명의 할머니도 엄 할머니처럼 인신매매를 당하거나 가정 형편을 돕기 위해 일을 시작한 경우가 많다.
햇살사회복지회 우순덕 원장은 "복지회에 등록된 할머니는 70명이지만 대부분 당신이 죄인이라는 생각에 쉽게 입을 열지 않아 채록 대상이 10명도 안 된다"고 설명했다. 우 원장에 따르면 가족과 함께 사는 할머니도 70명 중 2명뿐이다. 나머지는 정부로부터 매달 35만원 정도를 받는 기초생활수급자로, 15만~20만원의 방세를 내고 나면 20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한 달을 생활한다.
엄 할머니의 채록을 맡은 이하영(중앙대 사회학과 박사과정)씨는 "여성의 삶은 역사에도 잘 기록되지 않는데, 이런 기록을 통해 역사가 재평가되기를 바란다"며 "할머니들도 죄책감에서 벗어나 자존감을 높이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복지회는 11월까지 프로젝트를 진행해 결과를 단행본으로 묶을 계획이다. 우 원장은 "주한미군 이전비용이 약 13조원, 평택지원특별법 예산이 총 18조8,000억원에 이르지만 한때 지역경제의 60% 이상을 부양한 할머니들은 가시는 길에 쓰일 장례비 30만원이 없다"고 답답해 했다.
"자신이 양동이에 한 방울 떨어진 참기름 같다고 한 할머니가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과 섞이지 않는다는 거죠. 시민들부터 미군 '위안부'에 대한 생각을 바꿨으면 해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진중하게 듣고 기록으로 꼼꼼히 남기는 작업이 중요한 이유다.
평택=글ㆍ사진 김혜경기자 thank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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