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한국시간) 오전 5시. 미국 애플사가 매년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하는 세계개발자회의(WWDC)를 한 시간 남겨두고 행사장인 모스콘센터 서관은 커다란 건물을 둘러쌀 정도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흐린 하늘아래 빗방울까지 떨어졌지만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앞쪽에 서있는 사람들은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전날 밤부터 미리 와서 밤새 기다렸다.
WWDC는 애플 애호가들의 최대 축제이자, 전세계 정보기술(IT) 업체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행사다. 이 곳에서 아이폰과 아이패드 등 IT 흐름을 좌우하는 새로운 기기들이 발표됐기 때문이다. 올해는 5,200명의 청중들이 이 곳을 찾았다. 대부분 판매 개시 두 시간 만에 동이 난 1,700달러나 하는 입장권을 구매한 개발자들. 그나마 뒤늦게 줄을 선 500여명은 3층 행사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1층에 따로 마련한 방에서 스크린으로 스티브 잡스 애플 최고경영자(CEO)의 발표를 지켜봤다.
입장권이 비싼 이유는 2시간의 발표 뒤 4일 동안 120개에 이르는 개별 세션이 열리기 때문이다. 개별 세선은 행사를 참관하러 온 개발자들이 자신이 개발중인 애플 기기용 앱을 애플 소속 개발자들에게 1 대 1로 보여주고 풀리지 않는 문제나 부족한 부분에 대해 조언을 구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애플에서 1,000명의 개발자가 개별 세션에 참여했다. 한마디로 애플의 주요 인력이 총출동한 셈. 재능이 있으면 애플 직원으로 특별 채용된다. 박정훈 애플코리아 부장은 "WWDC는 단순 전시행사가 아닌 소규모 개발자들의 문제점을 해결해주는 IT 생태계를 고려한 자리"라고 설명했다.
30분 뒤 애플의 초청을 받은 귀빈 및 언론들의 입장을 시작으로 물밀 듯 행사장 안으로 쏟아져 들어간 사람들은 서로 앞쪽에 앉기 위해 달음박질 쳤다. 잡스를 가까이 보기 위해서다. 잡스의 등장에 열광하는 청중들의 모습은 마치 종교 제전을 연상케 했다.
이날 잡스는 세간의 기대와 달리 기기를 발표하지 않았다. 대신 기기를 움직이는 심장인 두 가지 소프트웨어와 한 가지 서비스를 발표했다. 애플이 만드는 맥킨토시 컴퓨터용 운용체제(OS)인 OS X의 새로운 버전 '라이온'과 아이폰ㆍ아이패드 등 모바일 기기용 OS 'iOS5', 그리고 애플의 야심작 '아이클라우드'(iCloud)였다.
애플, 심장을 발표하다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잡스가 직접 발표한 아이클라우드. 사진, 음악파일, 전자책, 전화번호부, 일정, 메일 등 공유를 원하는 이용자의 모든 콘텐츠는 자동으로 인터넷에 저장되고 이용자가 사용하는 스마트폰, 태블릿PC, 컴퓨터에 전송된다. 이 과정은 각 기기가 스스로 인터넷에 올리고 내려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애플의 기기라면 언제 어디서나 모든 콘텐츠를 이용할 수 있다. 심지어 애플의 온라인 소프트웨어 장터인 앱스토어에서 구매한 응용 소프트웨어(앱)도 아이폰, 아이패드, 맥킨토시 등 모든 기기에서 별도 비용없이 이용 가능하다.
자동 백업도 지원된다. 즉, 아이폰의 모든 자료를 인터넷에 저장했다가 폰이 바뀌면 고스란히 되살려 주는 기능이다. 휴대폰 분실이나 고장시 유용하다.
특히 파괴적인 것은 무료라는 점. 잡스가 "공짜"라고 힘주어 말하자 청중들은 깜짝 놀란 듯 탄성과 함께 길게 환호했다. 1인당 5기가(GB) 용량이 무료 제공되며 30일간 담아놓을 수 있는 사진, 음악파일, 앱은 제공 용량에 포함되지 않아 얼마든지 올릴 수 있다. 애플은 아이클라우드를 우선 개발자들을 위해 이날부터 iOS 4.3 시험판에 포함해 제공하고, 일반 이용자들에게는 올 가을에 나오는 iOS5에 넣어서 제공할 예정이다. 잡스는 아이클라우드를 위해 몇 년에 걸쳐 노스캐롤라이나에 건설한 대규모 데이터센터 사진을 공개했다.
하지만 복병은 있다. 안전성과 보안 문제다. 해킹이나 사고 등으로 서비스가 중단될 경우 데이터를 잃을 위험성이 있다. 행사 전날 블룸버그방송과 CNN 등 현지 언론들은 클라우드 컴퓨팅의 위험성을 보도하기도 했다. 잡스는 이를 의식한 듯 "클라우드 컴퓨팅의 민감한 문제인 보안을 각별히 신경쓰고 있다"는 말로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이날 공식 발표는 없었지만 노스캐롤라이나 데이터센터 옆에 애플은 또 다른 대규모 데이터센터를 구축할 것으로 알려졌다. 잡스가 발표한 내용에는 빠졌지만 앞으로 애플은 영화도 아이클라우드를 통해 제공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즉, 인터넷으로 구입한 영화 파일을 스마트TV인 애플TV를 포함한 모든 애플의 기기에서 이용하는 방안이다. 그만큼 아이클라우드가 애플의 주요 사업으로 부상했다는 뜻이다.
파격적인 iOS5, 카카오톡 위협할 듯
시연을 통해 선보인 iOS5도 파격적이다. 당장 눈에 띄는 것은 PC로부터 독립이다. 지금까지 아이폰이나 아이패드 등 iOS를 사용하는 기기들은 처음 구입하면 PC에 연결해 인증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럴 필요없이 기기를 켜면 바로 사용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OS 자동 갱신도 PC에 연결할 필요없이 기기에서 직접 하게 된다.
'아이(i)메시지'도 강력한 복병이다. 이 기능은 아이폰 아이패드 등 iOS를 사용하는 기기들 간에 와이파이를 통해 무료로 문자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능이다. 쉽게 말해 카카오톡이나 다음의 마이피플, NHN의 네이버톡과 동일한 모바일 메신저 서비스를 하는 셈이다.
이밖에 트위터가 기본 내장돼 아이폰 카메라로 촬영해 바로 올릴 수 있는 기능, 특정일과 특정 장소에서 해야 할 일을 알려주는 '리마인더', 문자나 메일ㆍ사회관계형서비스(SNS)에 새로운 내용이 수신되면 자동으로 알려주는 기능, 아이패드에서 가상 글자판이 좌우로 갈라져 엄지손가락만으로 입력할 수 있는 기능 등이 추가된다. iOS5는 아이폰3GS, 아이폰4, 아이패드와 아이패드2에서 모두 사용할 수 있다. 역시 무료다.
라이온은 맥킨토시 컴퓨터 이용자들에게 희소식이다. 가장 큰 변화는 아이폰과 아이패드의 기능을 컴퓨터로 옮긴 점이다. 패드 부분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면 새로운 바탕화면이 나타나고, 두 손가락을 움직여 사진을 키우거나 줄이는 등 많은 기능을 마우스 없이 손가락으로 할 수 있다. 국내에서는 맥킨토시 컴퓨터 이용자가 PC 이용자보다 적어서 주목을 못받았지만 이날 청중들 사이에서 라이온은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라이온은 7월에 출시될 예정이다. 이날 행사에 참가한 네오위즈인터넷 서비스개발본부의 손광현씨는 "사람들은 기기에 더 많은 관심을 갖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기기를 움직이는 소프트웨어"라며 "그런 점에서 이번 행사는 애플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라고 강조했다.
샌프란시스코=최연진기자 wolfpa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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