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정권의 순풍을 등에 업은 신상옥 감독이 승승장구 하는 반면, 나는 군사정권의 영화계 개입이 영 마뜩찮고 불편했다.
그 당시 5ㆍ16군사정권하의 중앙정보부 요원, 보안사 군인들은 영화사마다 찾아 다니면서 작품기획에 개입을 했고, 시나리오가 군사정권에 불만을 갖는 내용이지 않은가, 반공 문제에 저촉되는가 등등 이런저런 간섭을 했다. 영화라는 것은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만들어도 좋은 작품이 만들어질까 말까 하는데 보안사 군인들이 영화사에 출입을 하고, 중앙정보부에서 수시로 왔다 갔다 하니 일종의 공포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다들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말았다. 나 또한 '이런 데서 내가 영화 생활을 어떻게 하나' 회의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61년 5·16군사혁명 이후 62년에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전격적으로 발표한 영화법에 의해 영화계가 하루아침에 재편되어 71개사에 이르던 영화사가 17개사로 통합되었고, 신규 영화사 등록은 거의 불가능한 통제의 상황이 되었다. 시나리오는 사전 심의를 했으며 작품이 완성 뒤의 검열도 강화되었다. 이런 외압적이고 살벌한 분위기에서 좋은 작품이 나오기는 힘들겠다고 판단했다. 후에 사가(史家)들이 평하는 군사정권 이후 한국문화의 쇠퇴기, 특히 '한국영화의 암흑기'가 시작되는 징조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는 심지어 영화사 등록제에 의무편수조항까지 추가되었다는데 난 그 때 이미 홍콩에서 영화를 찍고 있어서 그 지경까진 못 겪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당대 최고의 배우 윤정희, 신성일 주연의 '돌무지'(1967)를 촬영할 때였다. 당시 배우들이 대부분 그랬지만 특히 윤정희와 신성일은 최고의 스타였고 당연히 스케줄 변동이 잦았다. 어느 날 새벽, 집 앞에 앰뷸런스가 오더니 "잠깐 타시죠"하여 신원확인을 하니 중앙정보부라고 했다. 중앙정보부 감찰실에 도착해 보니 커다란 돔 같이 둥근 천정의 미군병사 막사 형태를 한 건물 안 한 가운데 의자 한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한 시간쯤 혼자 앉아있으려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본의 아니게 깊이 있는 반성(?)을 해야 했던 것이다. 한 시간 후에 방준모 대령이라는 감찰실장이 들어와서 깜짝 놀랐다. 그는 동네 후배라서 늘 내게 깍듯이 "형님"으로 칭하던 이였는데 "정 감독"이라고 호칭을 바꿔 협박을 했다.
"'돌무지'란 반공영화 찍는 데 왜 협조 안 하는 거냐? 촬영 진척이 없어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한테 기합을 받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내가 '돌무지'의 감독인데 협조를 안 하다니? "당신은 오해를 하고 있다. 그 책임은 내게 있지 않다. 배우들의 스케줄을 영화사 제작부장이 잡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배우만 데려오면 언제든지 촬영이 가능하다"고도 말했다.
다음 날 그들이 배우를 데려왔고 제작부장 김성희가 혼이 나는 것을 보며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그 즈음 난 한국홍콩 합작영화를 한창 찍고 있었다. 한국홍콩 합작 영화는 일찍이 '망향'(1958)부터 시도됐었다. 홍콩의 아주전영공사에서 합작 제안을 했었고 촬영감독은 지금 강원산업 부회장으로 서울대 공대 출신인 정인엽이었다. 한국 쪽 출연자는 양미희 김석훈 노능걸 주선태 등이었고 홍콩 측에서는 상관청화라는 육체파 여배우, 저명한 감독 강명, 스타 여배우 맥링이 여자 주인공, 을 감독한 나유, 나유의 부인 류량화 등이 조연으로 출연했다.
당시 합작조건은 상호 기술 교류는 물론, 제작비 절감을 위해서 제작비를 반반씩 부담하는 것이었다. 시장성 확보를 위해 한국과 홍콩 시장을 분할하여 개척하자는 취지에서 합작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가장 어려웠던 점은 촬영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양측 스태프의 언어 소통 문제였다. 지금은 중국어 통역도 많고 중국과 교류가 활발해서 중국 유학생도 많지만 그 당시에는 막막하기만 했다. 언어 소통 문제 때문에 두 달 예정이었던 촬영이 네 달 걸리는 식이었다. 나는 다행히도 학창시절 외국어를 영어가 아닌 중국어로 선택한 덕분에 활동하기에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할 수 있었지만, 전문적인 말은 할 수 없었으니 어려움은 마찬가지였다.
네 달 넘게 촬영일정을 초과하다 보니 홍콩 쪽은 자금 사정이 좋았고 우리는 넉넉지 못할 때인지라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촬영이 끝나고 프린트를 모두 다 만든 다음에 우리 쪽 제작자는 필름 원판을 아주전영공사에 아주 줘 버릴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듀플리케이팅 네거티브(Duplicating Negativeㆍ원본 필름의 복사본)를 만들어 보내줘야 하는데, 영세하다 보니 이 과정을 생략하고 원판을 주게 되어 '망향' 역시 남은 필름이 한국에 없다.
그 뒤에도 합작 제의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특히 로맨스 스토리가 많았는데 그 중에서 '봉화청천' '장상억' '조용한 이별' '순간은 영원히' '망향' '정염' 등이 기억난다. 이 중 절반은 지금도 홍콩에 프린트가 남아 있다. 2004년에 홍콩에서 열린 회고전에서는 '조용한 이별'이 상영됐다. 그 작품 같은 경우도 홍콩에는 필름이 있는데 한국에는 없는 안타까운 상황의 한 예에 해당한다.
'조용한 이별'은 전쟁이 가져온 비련을 담고 있고 '장상억'은 중국 제목이었던 長ㆍ想ㆍ憶 이 암시하고 있다시피 한국 청년을 잊지 못하고 항상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한 여성의 이야기다. 이런 멜로드라마들이 홍콩 시장에서 꽤 반응이 좋았다. 그래서 계속 같은 스타일의 영화를 제안 받았지만, 난 그때 이미 액션영화에 발을 들이고 이에 전념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런 영화는 내게 있어서 외도 같은 것이었다.
'순간은 영원히'(1966) 같은 경우 홍콩으로 스카우트 된 결정적 계기가 된 작품이다. 한국과 일본 홍콩 대만 등에서 현지 로케했고, 한국 배우로는 남궁원 윤일봉 김혜정, 홍콩배우는 장중문 맥링 왕호가 출연했다.
이 작품은 홍콩 번화가에 우리 주연 배우들을 등장시켜 몰래 카메라 식으로 촬영한 장면 때문에 특별한 평가를 받았다. 거리의 행인들이 촬영인지 실제상황인지 아무 영문도 모르고 있다가 난데없이 총격전이 벌어지자 거리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총알이 날아다니는 한 가운데 그들이 서있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물론 경찰이나 관공서에는 사전에 비밀리에 통보를 했고 시민들에게는 공지를 안 했으니 사실적인 장면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배우들의 클로즈업 장면은 조용한 뒷거리에서 망원으로 담았다. 아주 감쪽같았다.
이 장면을 눈 여겨 본 사람이 당시 홍콩 최대 영화사인 쇼브라더스의 사장 란란쇼였다. 란란쇼 사장이 내게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그는 "홍콩 감독들이 이런 장면을 촬영하려면 스튜디오 안에 세트를 짓고 막대한 제작비를 들입니다. 그런데도 리얼하게 화면에 담지 못하는데, 당신은 제작비도 절감하면서 완성도 높은 영상을 화면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며 나를 극찬했다. 그리고 자신은 호금전과 장철 예풍 이한상 같은 홍콩 무협영화 거장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지만 현대물 액션을 하는 감독이 없으니 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해서 꼭 영입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제안한 전속 감독 연출료라는 것이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거액이었다. 더구나 1년에 세 작품을 보장해 준다면서 "5년 계약을 하자"는 것이었다.
아시아 굴지의 영화사 쇼브라더스는 홍콩 클리어 워터 베이(KOWLOON CLEAR WATER BAY)에 쇼 무비타운(MOVIE TOWN)을 가지고 있었고 세계 각국에 1200여개의 극장을 가지고 있었다. 가히 아시아의 할리우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좋은 제작 환경 속에서 좀 더 국제적으로 활동 할 수 있는 기회였고 자기 역량에 따라서 얼마든지 뻗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꿈같은 제안이었다.
난 흔쾌히 란란쇼의 제의를 수락했다. 쇼브라더스로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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