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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의 시로 여는 아침] 다행한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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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의 시로 여는 아침] 다행한 일들

입력
2011.06.05 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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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려, 비가 내리면 장롱 속에서 카디건을 꺼내 입어, 카디건을 꺼내 입으면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호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조개껍데기가 만져져, 아침이야

비가 내려, 출처를 알 수 없는 조개껍데기 하나는 지난 계절의 모든 바다들을 불러들이고, 모두가 다른 파도, 모두가 다른 포말, 모두가 다른 햇살이 모두에게 똑같은 그림자를 선물해, 지난 계절의 기억나지 않는 바다야

지금은 조금 더 먼 곳을 생각하자

런던의 우산

퀘벡의 눈사람 아이슬란드의 털모자

너무 쓸쓸하다면,

봄베이의 담요

몬테비데오 어부의 가슴장화

비가 내려, 개구리들이 비가 되어 쏟아져 내려, 언젠가 진짜 비가 내리는 날은 진짜가 되는 날, 진짜 비와 진짜 우산이 만나는 날, 하늘의 위독함이 우리의 위독함으로 바통을 넘기는 날,

비가 내려,

비가 내리면 장롱 속 카디건 속 호주머니 속 조개껍데기 속의 바닷속 물고기들이 더 깊은 바닷속으로 헤엄쳐 들어가, 모두가 똑같은 부레를 지녔다면? 비가 내릴 일은 없었겠지,

비가 내려, 다행이야

● 베를렌은 이렇게 노래했어요. ‘진정 까닭 모르는 슬픔이란/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사랑도 증오도 없건만/내 마음에 한없이 비가 내린다.’ 거리에 내리는 비는 마음에 내리는 눈물. 비가 오면 으슬으슬한 기억들이 몰려나오고 기분은 가라앉아요. 게다가 비 오는 아침이라니…. 출근 준비를 집어치우고 달팽이처럼 창문에 달라붙어 상념에 빠지고 싶어요.

그런데 이 시인은 비가 내려 다행이래요. 뭐가 다행이라는 거지? 우리는 먼 옛날 물속에서 살았던 종족. 비는 그곳의 기억을 불러다 줍니다. 모두 다 물이어서 어느 게 젖은 슬픔이고 어느 게 환한 기쁨인지 구별도 안 되던 곳. 모두 다 물이어서 내 슬픔, 네 슬픔 분명히 가를 수 없던 곳.

그 아름다운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하지는 말아요. 그렇지만 내 것 아닌 알 수 없는 고통이 비처럼 내릴 때 함께 젖으며 걸을 수는 있지 않니? 누구나 지난 계절의 고통을 호주머니 속 조가비처럼 만지작거리고 있으니까. 이렇게 말하는 정직한 마음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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