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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계단 하나 남겨 놓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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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계단 하나 남겨 놓는 삶

입력
2011.06.03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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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상 수상소식을 동료교수들에게 알렸습니다. 예술을 좋아하는 미국인 친구가 수상자 명단을 보고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함께 이름을 올리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축하해주더군요." 1일 호암상을 수상한 미국 일리노이 대학의 물리학 전공 하택집 교수의 수상소감이다.

무대 위에 앉아 계시던 정경화 선생님이 하교수의 소감에 환한 미소로 답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숙이셨다. 애잔한 라흐마니노프의 선율이 오순화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축주로 울려 퍼지자 지난달 소천하신 어머니 이원숙 여사가 생각난 듯 왈칵 눈물을 쏟은 것이다. 이어 수상소감에서 본인의 성공은 '최고의 매니저'인 어머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오래 전, 이화여고 유관순 기념관에서 정경화 챔버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연주 했을 때가 생각났다. 무대 리허설 중 정경화 선생님의 지시 아래 단원들이 여러 번 자리를 옮겨가며 소리 울림이 좋은 위치를 찾으려 했으나 연주전용 공연장이 아닌 탓인지 오케스트라 소리는 여전히 건조하기만 했다. 어쩔 수 없이 음향은 포기하고 그냥 보기 좋은 곳에서 하려는데 이원숙 여사님이 "경화야, 우리 30년 전에도 여러 군데 시도해보다가 저 곳에서 하지 않았니?"라며 다소 엉뚱한 위치를 가리키셨다. 지나치게 무대 안쪽이라 관객과 거리가 너무 먼 것 아닌가 반신반의하며 단원들이 이동했다. 그런데 소리를 내어보니 의외로 부드럽게 잘 울리는 것이 아닌가. 그 옛날의 사소한 일까지 기억하는 것에 단원들이 놀라자 그 음악회는 공연 시간에 기차 기적소리를 내지 말아달라고 관계부처를 찾아가 부탁까지 하신 터라 특별히 기억한다고 웃으셨다. 아마 어떠한 능력 있는 매니저도 감히 명함도 못 내밀 것이라고 단원들끼리 농담한 기억이 있다.

정경화 선생님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그러한 무한한 사랑과 가르침을 앞으로 재능 있는 어린 학생들을 성장시키는데 기여함으로써 보답하겠다고 했다. 문득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나눔을 실천한다는 박원순 변호사가 떠올랐다. 안길수 저 에서 박 변호사는 비록 배움이 짧고 가난했을지언정 굶주린 이들을 홀대하는 법 없었던 부모님을 회고했다. 양친이 돌아가신 후,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곧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거라 생각한다는 박 변호사. 그가 생각하는 나눔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삶을 마감하는 순간 이 세상 누군가를 위해 작은 계단 하나를 남겨 놓는 것이라고 한다.

2월 타계하신 박완서 작가의 유족들은 얼마 전 고인의 전 재산을 모교에 기부했다.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도 문상 올 후배 문인들의 주머니 사정부터 걱정하여 부의금을 받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신 마음을 기린 결정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병상에서도 한 출판사의 수상작 선정을 위해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다 읽었을 정도로 문학을, 후배들을 사랑하셨던 분이다. 그 기사를 읽으며 돌아가시기 이틀 전 잠깐 정신이 드셨을 때 어린 제자의 유학을 위해 국제전화를 하셨던 나의 스승 고 이종숙 교수님이 떠올라 한참 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오직 제자들에 대한 사랑으로 꽉 차셨던 분이다.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성실히 살아가는 모습에서, 또는 베풀어준 사랑에서 남겨진 사람들은 많은 것을 배운다. 남을 위한 디딤돌이 되라는 삶의 가치를 물려받은 사람들이 만들어 갈 작은 계단 하나가 모여 거칠어져 가는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품어 줄 거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김대환 단국대 교육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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