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누이트·바이킹 융합 독특한 문화, 500년 앞서 아메리카 발견
그린란드인들은 독특한 외모를 지녔다. 특히 눈빛은 매우 특이하다. 빙산이 지닌 청빙의 그 푸른 빛을 담은 것 같기도 하고, 빙하의 회색 빛이 스며든 것 같기도 하다. 4,000년 넘는 역사가 지금의 그린란드인의 외모와 눈빛을 만들었다.
제일 처음 그린란드 땅에 이주해 그린란드 이누이트문명을 시작한 이는 캐나다에서 건너온 이누이트들이다. 캐나다와 그린란드 사이 좁은 해협의 얼어붙은 바다를 넘어온 이들로 기원전 2,400년 처음 발을 디뎠다.
캐나다서 넘어온 이누이트문명은 시기에 따라 여러 개로 나뉘어진다. 인디펜던스 ⅠⅡ, 사과크(Saqqaq), 도셋(Dorset), 툴레(Thule) 등이 각 문명을 구분 짓는 말이다. 기원전 500년부터 번성했던 도셋문화일 때 겨울 사냥의 임시 거처인 이글루가 만들어졌고, 서기 900년께 들어온 툴레문화 때 카약과 더욱 정교해진 작살 등으로 고래 사냥을 쉽게 하게 됐다. 툴레문화를 전파한 이누이트가 지금 그린란드인의 직계 조상이다. 개썰매도 툴레문화 때 시작됐다.
이누이트의 툴레문화가 위에서부터 내려올 무렵, 남쪽에는 유럽의 문명이 첫발을 디뎠다. 그린란드에 첫 유럽을 알린 이는 바이킹이다. 아이슬란드로 이주해 살던 바이킹 중 군비요른 울프손이 뱃길을 잘못 들었다가 그린란드를 발견하고 고향에 돌아가 이 땅의 존재를 알렸다. 이 땅에 처음 정착한 바이킹은 스나에비요른 갈티 일행이다. 978년 큰 죄를 짓고 아이슬란드에서 추방된 이들은 언젠가 들은 그 땅을 찾아 나섰고 지금의 그린란드 동남쪽 타실라크에 터를 잡았다. 하지만 첫 겨울을 못 견디고 눈 속에 파묻혀 전멸했다.
그 다음 그린란드를 찾은 이가 붉은 털 에릭으로 유명한 에리쿠 프로발드손이다. 그 또한 살인죄로 추방돼 982년 추종자들과 25척의 배를 끌고 그린란드로 갔다. 그들은 지금의 카시아수크에 터를 잡았다. 마침 그린란드엔 중세 온난기가 찾아왔다. 땅에선 파란 풀이 돋아 양을 키울 수 있었고, 작물 재배도 가능했다. 살만한 땅을 얻은 붉은 털 에릭은 더 많은 일꾼이 필요해 아이슬란드로 돌아가 사람을 모았다. 저 곳에 풀이 가득한 녹색의 드넓은 땅이 있다고. 그래서 생겨난 게 그린란드란 지명이다. 붉은 털 에릭의 과장 광고에 혹해 500명이 그린란드에 왔고 작은 유럽을 건설했다. 그들은 양과 소를 키웠고, 밀과 보리 양배추를 재배했다. 유럽 성당을 본뜬 교회도 세웠다.
그러나 15세기 유럽에 닥친 소빙하기 때 그린란드 바이킹은 허무한 종말을 맞는다. 1408년 교회에 쓰여진 결혼식 기록을 마지막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왜 종말을 맞았는지 설들만 분분하다. 전염병설, 이누이트 흡수설에 교황의 사주를 받은 해적들에게 납치됐다는 설도 있다. 가장 믿을 만한 건 추워진 그린란드에 적응하지 못한 기후설이다. 유적을 보면 날이 추워졌는데도 농사를 고집했던 흔적이 있다. 땅이 얼어 풀이 사라지면 가축도 사라졌을 것이고, 식량도 구할 수 없었을 터. 이누이트들처럼 혹한에 적응했으면 좋았을 것을 유럽인의 자존심을 지키느라 그만 슬픈 종말을 맞게 된 것이다.
잊혀졌던 그린란드에 다시 유럽의 손길을 뻗친 건 1700년대 초 루터파 목사인 한스 에게드에 의해서다. 노르웨이에 전도하러 갔다가 그린란드 바이킹 이야기를 전해 듣고 아직도 그들이 살아 있다면 개신교로 개종시켜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덴마크 국왕의 도움을 받아 그린란드에 도착했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린란드 바이킹의 흔적뿐이다. 그는 꿩 대신 닭으로 이누이트족들에게 선교 활동을 폈다. 1728년에는 지금의 수도인 누크 자리에 고트호프란 도시를 세워 개종 활동에 몰두했다.
이후 400여년간 유럽의 각 국가들이 고래기름을 구하러 앞다퉈 그린란드를 찾았고, 덴마크의 식민 지배가 이어지며 수많은 혼혈인들이 태어났다. 계속된 혼혈화 과정에서 순수 혈통의 이누이트는 서서히 사라져갔다. 이젠 그린란드 이누이트가 아닌 그린란더로 불리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그린란드 바이킹의 시조인 붉은 털 에릭의 아들인 레이프 에릭손은 그린란드에서 배를 출발해 오늘날 캐나다 뉴펀들랜드 북쪽에 도착, 빈란드란 이름을 짓고 정착했다. 콜럼부스 보다 500년 앞서 아메리카를 발견, 마을을 이룬 것이다. 빈란드는 오래가지 못했다. 왜 사라졌는지에 대한 사료는 남아 있지 않다. 그들은 인디언에 전멸됐거나, 자기들끼리 싸우다 자멸했거나 역사에 아메리카의 첫 발자국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일루리삿(그린란드)=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고래마을 오캇숫, 요즘은 고래관광 성업
그린란드 바다는 원래 푸르디 푸르다. 그런데 18세기 오캇숫 앞바다는 붉은색이었다. 일대에서 고래를 무더기로 잡아 이곳에서 해체하면서 엄청난 고래 피가 바다로 흘러들었기 때문이다. 고래기름을 얻으러 유럽에서 찾아온 배들이 바다의 붉은 핏물을 따라 이 마을로 찾아들었다고 할 정도다. 오캇숫의 덴마크식 이름은 로데베이다. 붉은 만이란 뜻이다. 이곳에선 지금도 예전 고래잡이 전진 기지로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린란드는 1610년 영국의 모스코비상사가 고래 탐험선을 보낸 것을 계기로 열강의 포경 각축장이 됐다. 카약을 타고 고래를 사냥하던 이누이트와는 달리 영국 덴마크 프랑스 등은 바스크 용병을 고용하고 권양기(밧줄이나 쇠사슬로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거나 내리는 기계)와 작살 등을 이용해 무자비하게 고래를 포획하기 시작했다.
가장 선호했던 고래는 이곳 사람들이 그린란드고래라고 부르는 북극고래. 몸집이 20m가 넘는다. 천천히 헤엄치고, 5, 6마리가 함께 다니며, 죽은 뒤 물에 가라앉지 않아 가장 손쉬운 대상이었다. 더구나 고래기름양도 다른 고래의 몇 배는 됐다.
일루리삿에서 북쪽으로 22.5Km 떨어진 오캇숫에서는 고래가 해체되고, 지방 기름 고기 수염 뼈가 거래됐다. 지금도 오캇숫 해안에는 당시 거대한 고래를 땅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사용했던 도르래, 고래기름을 짜던 곳, 고래 저장고가 남아 있다. 고래 산업이 번창하자 1741년에는 덴마크 고래잡이 클라우스 토르프가 제2의 전진 기지를 이웃 마을인 일리마낙에 세우기도 했다.
14년 전 오캇숫의 독특함에 반해 독일 튀링겐에서 이주해 온 인고와 울프 부부는 오래된 포경 사무실을 개조해 H8이라는 레스토랑을 열었다. 이곳의 메뉴는 고래 고기와 그린란드의 대표 어종인 넙치 연어 등으로 차려낸 오캇숫 해산물 세트 하나. 푸짐하고 싱싱한 그린란드 해산물의 진미를 만끽할 수 있다. 수돗물과 하수처리시설이 없고 전기도 디젤 발전기를 통해 얻지만 18세기로 돌아가 고래잡이 전진 기지인 로데베이에 놀러 온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장소다. 노란 비닐이 끼워진 양동이 변기를 쓰는 것도 매력적이다.
그린란드 이누이트들에게도 고래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귀중한 양식이었다. 껍질 고기 내장은 모두 먹고, 뼈는 집을 짓거나 세공품으로 만들었으며, 수염은 엮어서 바구니를 짰다. 고래기름은 불을 밝힐 때 썼다. 이 때문에 그린란더는 아직 고래에 대한 열망이 강하다. 실제로 그린란드는 노르웨이와 일본에 이어 세계 3위의 포경 국가다.
그린란드더들이 최고로 치는 고래는 일각고래다. 신기하게도 머리 위에 기다란 외뿔이 달린 고래다. 1~3m에 달하는 뿔 때문에 바다의 유니콘이라 불린다. 이 뿔이 초기 그린란드와 유럽과의 교역에선 가장 중요한 무역품이었다. 유럽에선 이 뿔을 보고 유니콘의 뿔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일각고래의 뿔은 실제론 뿔이 아니라 왼쪽 엄니가 자란 것으로 수컷에서만 발견된다. 용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사자의 갈기나 공작의 깃털처럼 2차 성징(性徵)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길이를 견주거나 싸울 때 쓰인다.
북위 70도 이상에서만 서식하기 때문에 그린란드 최북단 마을인 카낙이 일각고래 잡이의 최적지로 꼽힌다. 그린란드 최북단 툴레에 흩어져 살던 이누이트들이 냉전 시대에 건설된 미 공군기지에 밀려 북쪽으로 30여km 떨어진 곳에 새로 형성한 곳이 카낙이다.
일각고래는 여름철 바다가 녹아 길이 생기면 그 길을 따라 해안으로 밀려온다. 무리 지어 다니는 일각고래의 이동이 목격되면 카낙 지역 라디오에서 일제히 고래떼의 동향이 방송된다. 해안가 얼음 위에 사냥꾼들의 텐트가 장사진을 이룬다.
현대화한 사냥꾼들은 총을 쏘아 대지만 전통 이누이트들은 옛 방법을 선호한다. 카약과 작살을 이용한 전통 방법은 이누이트들의 자부심이기도 하지만 실용적이기도 하다. 총으로 사냥할 경우 총에 맞은 고래가 바로 가라앉기 때문에 맞췄다고 할지라도 실제 건져 올리는 확률이 매우 적다. 이 때문에 무게중심이 낮아 기동성이 좋은 카약으로 길목을 지키다 일각고래가 목격되면 재빨리 다가가 고래에 작살을 꽂는다. 작살 끝에 물개 가죽으로 만든 부표가 달려 있어 고래는 바다 깊숙이 잠수하지 못한다. 이때 사냥꾼은 부표를 뒤쫓아가 총으로 마지막 숨통을 끊는다.
이렇게 잡은 일각고래의 뿔은 kg당 3,000크로네로 팔려나간다. 높은 가격이다. 일각고래 보호를 위해 그린란드 정부는 일각고래 뿔의 해외 반출을 금지하고 있다. 이누이트들도 쿼터제가 적용돼 1인당 잡을 수 있는 수가 제한된다.
해마다 이맘때면 그린란드의 고래 투어가 시작된다. 하루 종일 해가 지지 않기 때문에 밤낮없이 배를 타고 나가 고래를 보려는 관광객들이 줄을 잇는다. 실제로 고래를 목격할 수 있는 확률은 90%를 넘는다.
오캇숫(그린란드)=조영호기자 youcho@hk.co.kr
■ 탐험대 크레바스 빠져 악전고투
한국일보 주최로 그린란드 북극권 종단에 나선 홍성택탐험대가 초반부터 여러 악재가 돌출하면서 악전고투를 계속하고 있다.
지난달 30일(현지 시간) 오전 8시께 북위 68도에서 출발한 탐험대는 1일 현재 북위 67도59분48초, 서경 48도24분42초를 지나고 있다. 해발 970m에서부터 남동쪽으로 고도를 높이며 이동한 탐험대는 썰매견이 보다 단단한 얼음 위에서 달릴 수 있는 해발 1500m까지 올라간 뒤 남쪽으로 이동 중이다. 이제껏 달린 거리는 총 116km. 하루 평균 38.6km 이상을 달려 왔다. 여러 어려움 속에 전진한 것을 고려하면 상당한 성과다.
탐험의 성패를 쥐고 있는 썰매견 16마리는 출발 전 건강 상태가 나빠지기도 했지만 모두 회복돼 개썰매 운행에 모두 투입됐다. 헬기 운송 때 민감했던 유레카는 완전히 안정을 찾았고, 다리를 절뚝거렸던 푸모리도 다행히 건강하게 달리고 있다.
썰매가 달리는 해발 1,500~2,000m급의 그린란드 내륙은 온통 얼음과 눈으로만 이뤄진 세상이다. 바위 하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스링크 같은 평평한 얼음판만 지나는 것은 아니다. 빙하가 유동할 때 생긴 크레바스와, 바람이 만들어 낸 얼음 언덕이 썰매의 속도를 늦춘다. 31일에도 고도를 높이는 과정에서 썰매가 크레바스에 빠져 6시간 밖에 운행하지 못했다.
현재 탐험대 진로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얼음 위에 쌓인 눈의 상태다. 단단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슬러시 상태인 곳이 많아 발이 푹푹 빠질 정도다. 대원들과 짐을 실은 개썰매의 무게가 600kg에 달해 썰매 날이 눈에 박하면서 16마리의 썰매견에게 채찍을 가해도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한다.
크레바스를 탈출하고 질척한 얼음 속을 질주하느라 썰매견이 마라톤을 뛴 선수들처럼 근육이 뭉치고 피로를 느끼고 있다. 휴식을 주지 않으면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기 때문에 자주 운행을 멈추고 있다. 하지만 멈출 때마다 거센 바람과 추위 속에서 개썰매에서 썰매견을 풀어 분산 배치하고, 텐트를 쳐야 하기 때문에 이 어려움도 크다.
이곳 기온은 최저 영하 20도까지 내려간다. 그러나 식사를 위해 잠시 붙여진 버너 불을 제외하곤 추위를 견딜 유일한 난방 도구는 침낭뿐이다. 대원들은 그나마 텐트 안에서 바람을 피할 수 있지만 썰매견들은 맨몸으로 추위와 눈보라를 이겨 내야 한다.
탐험대는 6일께 북위 68도 지점에서 헬기를 통한 1차 보급을 받는다. 썰매견들이 먹을 사료와 대원들 식량 등이 주요 보급품이다.
그린란드=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지금은 종일 해가 지지 않는 백야…겨울엔 종일 해가 뜨지 않는 흑주
북극권을 나누는 선이 있다. 북위 66도 33분이다. 이 위도에서 북극까지가 북극권이다. 북극권에 있으면 1년 중 최소 단 하루에서 많으면 다섯 달 동안 해가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여름엔 백야(白夜)가, 겨울엔 흑주(黑晝)가 명확히 생기는 지역이다.
북극과 가까운 그린란드는 영토의 상당수가 북극권에 있다. 홍성택그린란드탐험대의 베이스캠프가 있는 일루리삿의 경우 북위 69도다. 요즘엔 오후 11시가 지나도 태양이 수평선 위에서 눈부시게 빛을 내뿜는다. 밤새 어둡지 않다. 조명을 비추지 않아도 책을 읽을 정도로 환하다. 빛에 민감한 이들은 잠을 청하기 쉽지 않다.
여름의 백야보다 참기 힘든 건 겨울의 흑주다. 북극권에서도 북극에 가까울수록 낮에도 해가 뜨지 않는 날이 많아진다. 태양이 없는 세상을 어떻게 견뎌 왔을까. 그린란드 이누이트들은 하얀 설원에 반사된 달빛과, 밤하늘에 펼쳐지는 오로라가 있어 보낼 만하다고 한다. 그린란드 전역에선 오로라를 볼 수 있다. 단 백야의 여름을 제외하고다. 오로라는 계절에 상관없이 생기지만 환한 여름 밤엔 그 오로라빛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누이트들은 오로라가 밤하늘에서 춤을 추면 이는 죽은 자들이 바다코끼리의 해골을 가지고 공놀이를 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긴긴 겨울을 보내야 하는 이들이기에 태양을 기리는 마음이 절실하다. 몇 달을 해를 보지 못하다 지평선이나 수평선 위로 태양이 떠오를 때 그 얼마나 가슴이 벅차오르겠는가. 일루리삿의 경우 매년 1월 13일엔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인근의 세키니아픽이란 언덕으로 개썰매를 끌고 올라간다. 그리곤 그곳에서 노래를 부르며 태양의 귀환을 함께 환영한다.
해가 가장 긴 6월 21일 하지 때는 그린란드 전체가 큰 축제를 벌인다. 화려한 서머페스티벌이다. 귀한 고래 고기를 나누며 태양에 고마움을 표한다. 그날은 그린란드의 공식 국경일이다.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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