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인 그는 청진기 대신 카메라를 들었다. '렌즈 달린 청진기'가 닿은 곳은 썩은 내 나는 한국의 의료계였다. 환자를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게 강요하는 현실은 '정글'이나 다름없었다. 산업의학과 전문의인 송윤희(32)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그래서 '하얀정글'이다.
송 감독의 다큐엔 종합병원부터 개인병원까지 장삿속이 된 의료 현실이 담겼다. 한 대학병원은 교수회의 때 의사들의 한달 수입순위를 파워포인트로 보여준다. 환자는 곧 실적이고 돈인 셈이다. 다큐에 등장한 의사들은 "(실적에 따라) 인센티브가 있다""(그렇게 순위를 매기니) 나도 모르게 '오늘 검사 몇 건이네. 그러면 월급을 얼마 더 받겠네'하고 세어보게 된다"고 털어놓는다. 매일 의사에게 외래 진료 환자수와 병상 가동률을 문자메시지로 통보하는 곳도 있었다. 다큐에는 의사에게 전달된 문자가 고스란히 담겼다. 송 감독은 "의사인 나조차 몰랐던 수익성 의료행위가 대학병원에서 일어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른바'30초 진료'도 그 단면이다. 송 감독은 '몰래 카메라'로 30초 진료를 받고 진료실을 나서는 환자를 찍었다. 송 감독은 "다소 무리한 방법이었지만, 우리 의료계가 이대로 가선 안 된다는 문제의식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동시에 30초 만에 진료를 받고 나오는 환자의 심정도 담으려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나아가 송 감독이 겨눈 건 현 정부의 의료선진화 정책의 일환으로 거론되는 영리의료법인 허용문제다. 송 감독은 "30초 진료는 현실이지만, 의료민영화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미래"라며 "지금도 이 정도인데 병원이 민영화가 되면 돈 되는 비급여 진료항목이 훨씬 늘어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게다가 지금도 돈이 없어 병을 키우고 사는 의료소외계층이 있다. 이 다큐에는 극빈층이 대상인 의료급여 1종 수급권자인데도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진료비가 걱정돼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간경화에 시달리는 할머니가 나온다. 이런 '돈 없는 환자'는 송 감독이 다큐를 만들 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역시 의사인 남편에게서 너무 가난해서 병원에 제대로 오지도 못하는 환자들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 관심을 갖게 됐어요."
지난해 8월 기획에 들어가 10개월간 매달려 만든 '하얀정글'은 올해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실험상을 받았다. 촬영스태프 2명을 빼면 기획ㆍ구성ㆍ내레이션ㆍ편집까지 송 감독이 맡았다. 배급방법은 '공동체상영'을 택했다. 단체나 집단이 '하얀정글 공동체상영팀'(02-334-3166)에 신청하면 찾아가 상영하는 방식이다.
송 감독은 "누구나 같은 밥을 먹고 같은 해를 맞이하는 것처럼 누구나 똑같이 건강할 권리가 있다"며 "그 권리는 나라가 지켜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든 청진기가 따뜻한 이유다.
김지은기자 lun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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