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성 정체성을 그는 오래도록 드러내지 못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10년 넘게 홀로 방황한 그는 게이공동체에 발을 내디디면서 삶의 전환기를 맞는다. 다른 게이들과 고민을 공유하고 게이들로 구성된 합창단 활동을 하며 삶의 새로운 재미를 만끽한다. 공연장에 아는 누나들을 초대해 깜짝 커밍아웃을 하고, 고등학교 때 짝사랑했던 친구 가족에게 자신의 공연을 보여주기도 한다. 뇌수막염으로 서른 다섯 짧은 생을 마감하며 그토록 원했던 부모님 앞에서의 커밍아웃도 하게 된다. 게이 네 명의 삶을 탐색하는 다큐멘터리영화 '종로의 기적'에 소개된 최영수씨의 인생 막바지는 기적처럼 찾아온 황금기라 표현해도 좋을 듯하다.
'종로의 기적'은 게이인 이혁상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또 다른 게이 감독 소준문씨, 동성애자인권 운동을 펼치는 장병권씨, 요리사 최영수씨, 대기업 직원이었던 정욜씨 등 게이가 네 개 에피소드의 중심 인물로 각각 등장한다. 제작사는 성적소수문화환경을 위한 모임 연분홍치마와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요컨대 게이의, 게이에 의한, 게이를 위한 다큐멘터리다.
우리들 곁에 있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듯 영화는 담담하고 잔잔하다. 등장인물들은 영화를 찍기 위해 고심하거나 주변사람들의 인권 향상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행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이 대다수 사람과 다른 점은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라는 사실뿐이다.
카메라의 시선은 차분하지만 영화 속엔 소리 없는 구호들이 담겨 있다. 게이영화를 만들며 이성애자 스태프들의 벽에 둘러싸여 힘겨워하는 소준문씨의 사연은 우리 사회의 편견을 다시 한 번 확인케 한다. 그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체위'를 주장하지만 "말도 안 된다"는 스태프들의 반대에 부딪혀 연출 의도와 달리 촬영한 경험을 털어놓는다. 스태프들과의 소통에 실패한 그는 장편영화를 찍다 중도포기하기도 한다. "연애를 제대로 하고 싶어 인권운동을 한다"는 한의사 장병권씨, HIV감염자인 동성애인과 운명적 사랑을 나누고 HIV감염자들의 인권을 위해 힘을 다하는 정욜씨의 사연 등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삶 자체가 인권운동이 될 수밖에 없는 그들의 현실이 가슴을 누르기도 한다.
게이들이 즐겨 찾는 서울 종로3가의 모습과 게이들의 일상을 다뤘다는 점만으로도 눈길이 가고 의미 있는 기록이 될 영화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실험성 강한 영화들을 소개하는 와이드앵글 부문 대상(PIFF메세나상)을 차지했다. 2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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