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P3 플레이어, 스마트폰, 개인용 멀티미디어플레이어(PMP) 등 디지털 기기가 주를 이루는 시대에 국내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아날로그 기기가 있다. 바로 카세트 플레이어다.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라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큰 카세트 플레이어 시장으로 꼽힐 만큼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30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정확한 명칭이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인 이 제품은 국내에서만 연간 8만~10만대 이상씩 팔리고 있다. 언뜻보면 많은 수치가 아닌 것 같지만 사실상 멸종하다시피 사라져 미국 유럽 등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 기기인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으로 높은 판매량이다. 카세트 플레이어 생산업체인 인켈의 김병수 책임매니저는 "인켈만 연간 4만대를 판매할 만큼 국내에서 카세트 플레이어가 꾸준히 팔린다"며 "어학 및 업소용, 장년층이 주로 찾아 단종할 수 없는 제품"이라고 말했다.
한국이 세계 최대 시장
1970, 80년대에 카세트 플레이어는 대부분의 가정이 하나씩 갖고 있던 필수품이었다. 카세트 테이프에 소리를 녹음해 재생하는 이 기기는 전축과 더불어 가정용 오디오 노릇을 톡톡히 했다. 특히 카세트 테이프만 구입하면 레코드판이나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를 녹음해 듣거나 선물할 수 있는 점이 장점이었다.
여기에 크기를 줄인 휴대용 제품까지 등장해 갖고 다닐 수 없는 레코드판의 한계를 넘어섰다. 덕분에 일본 소니가 만든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인 워크맨은 휴대용 음향 기기의 대명사가 됐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를 맞아 음질이 깨끗한 CD와 복제가 쉬운 MP3 파일이 등장하면서 카세트 플레이어는 전세계적으로 사라질 처지가 됐다. 일본 소니도 1979년 이래 2억2,000만 대가 팔린 워크맨을 지난해 3월에 생산 중단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카세트 플레이어가 꾸준히 팔리는 이유는 한국의 높은 교육열 때문이다. 아직도 유아들의 학습 교재 가운데 상당수가 카세트 테이프로 제작되고, 특정 구간의 반복 청취가 가능한 기능 때문에 어학 학습용으로 많이 팔린다. 또 술집이나 음식점 등 업소에서 하루 종일 음악을 틀어 놓거나 공공 기관 등에서 특정 방송을 정기적으로 내보내야 하는 경우에도 카세트 플레이어를 사용한다.
싼 가격과 간편한 조작성 또한 카세트 플레이어의 장수 비결이다. 가격은 1만원대에서 10만원대로 저렴하다. 복잡한 것을 싫어하고 과거에 구입한 카세트 테이프를 갖고 있는 장년층이 많이 구입한다.
전량 중국에서 위탁 생산
여기 맞춰 삼성전자 LG전자 인켈 등 국내 전자업체들은 카세트 플레이어를 꾸준히 판매하고 있다. 물론 자체 생산을 하지 않는다.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아 모두 중국에서 주문자개발방식으로 위탁 생산한 것을 들여와 판매만 할 뿐이다. 자유롭게 재생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제품부터 유아들을 겨냥해 헬로 키티 디자인을 적용한 제품까지 종류도 수십 종에 이른다.
심지어 워크맨 생산을 중단한 일본 소니도 중국에 하청을 줘서 한국과 인도 등 아시아 시장을 겨냥한 카세트 플레이어를 소량 위탁 생산한다. 소니에서도 한국의 카세트 플레이어가 꾸준히 팔리는 현상을 이례적으로 꼽고 있다. 소니코리아 관계자는 "한국은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카세트 플레이어가 꾸준히 팔리고 있다"며 "어학과 조기 교육이 빚은 기현상으로 전세계에서 유래가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카세트 플레이어의 운명을 장담하기 힘들다. 중국업체들의 생산량이 줄고 있기때문이다. 중국 생산업체들이 오로지 한국 시장만 바라보고 카세트 플레이어를 생산하고 있으나 부품 비용 등이 상승하면서 저렴한 디지털 기기 쪽으로 돌아서기 때문이다. 인켈 관계자는 "중국에서도 카세트 플레이어를 생산하는 업체는 2,3군데에 불과한데 이마저도 생산량을 줄이고 있어 난감하다"며 "중국 업체 요구 조건대로 가격을 올려주거나 자체 생산할 계획이 없어서 앞으로 국내 시장도 축소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최연진기자 wolfpa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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