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 사태가 중대한 전환점을 맞고 있다. 제2의 도시 벵가지에서 촉발된 반정부 민주화 시위가 27일 100일을 넘기면서 출구전략 논의가 다시 불붙는 양상이다. 이번엔 분위기가 확실히 다르다. 국제사회가 한 목소리로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의 퇴진을 촉구하고 나섰고, 정부군을 겨냥한 무력 공세의 수위도 한층 높아졌다.
반면 줄곧 '결사 항전'을 공언해 왔던 정부군은 휴전을 먼저 제의할 정도로 기세가 한 풀 꺾였다. 이 같은 현상의 이면에는 권력의 마지막 보호막인 군부가 등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알 아라비야 방송은 30일 화면 자막에서 "120명의 리비아 장교들이 탈출해 이탈리아 로마로 망명했다"고 전했다. 반 카다피 시민군 측도 이날 "장군 4명을 포함해 카다피 군부의 고위 인사 8명이 곧 로마에서 기자회견을 가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방 국가들은 군사적 압박 외에 심리전을 적절히 구사하며 카다피 국가원수를 옥죄고 있다. 외교적 고립에 처한 리비아 정부가 더 이상 국가를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러시아의 가세가 큰 힘이 됐다. 러시아는 지난주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에서 국제사회의 군사 개입을 비판하던 기존 입장에서 한 걸음 물러나 카다피 축출을 처음으로 언급했다.
반 카다피 시민군 세력이 고무된 것은 당연한 일. 과도국가위원회(TNC) 무스타파 압둘 잘릴 위원장은 29일(현지시간) "G8의 결정은 리비아 국민뿐 아니라 국제사회의 요구와 열망을 반영한 것"이라며 환영했다.
내전 조기 종식을 위한 군사적 수단도 총동원되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이 지난달 25일 수도 트리폴리에 사상 최대 규모의 공습을 감행한 데 이어 영국은 지하 벙커 등도 공격할 수 있는 벙커버스터 투입 방침을 시사했다. 리암 폭스 영국 국방장관은 이날 "리비아 정권의 지하시설 파괴에 쓰일 벙커버스터 '개량형 페이브웨이Ⅲ'를 이탈리아 지오이아 델 콜레 공군 기지에 대기시켜 놓았다"고 밝혔다. 무게가 907㎏에 달하는 페이브웨이Ⅲ는 건물의 벽과 지붕도 관통할 수 있는 파괴력을 지녔다.
NATO군은 지금까지 전투기에 의존해 리비아 정부군의 방공시설이나 군함, 군용 차량 등을 공격했으나 촘촘히 짜여진 지휘통제 시스템을 제거하는 데는 실패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미 투입이 결정된 최신 공격 헬리콥터 아파치는 저고도·저속 공격이 가능해 소규모 이동 타깃을 맡고, 벙커버스터는 카다피의 은신처인 바브 알 아지지야를 공략하는 데 효과적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부군이 더 이상 숨을 곳은 없다는 애기다.
이제 공은 카다피 측으로 넘어갔다. 칼레드 카임 리비아 외무차관은 "경제모임에 불과한 G8의 참견 따위에 신경쓰지 않는다"며 "우리는 아프리카연합(AU)을 제외한 어떤 조직체의 제안도 거부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30일 트리폴리를 방문한 제이콥 주마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의 행보가 주목된다. 그가 AU 대표자격으로 카다피 국가원수를 만날 예정이기 때문이다.
AFP통신은 주마 대통령실 관계자의 말을 빌려 "리비아 방문 목적은 카다피의 출구전략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라고 못박았다. 지난 4월 시도된 첫 중재는 카다피 측의 거부로 실패했지만, 상황 변화가 뚜렷해진 만큼 '신변 보장을 전제로 한 퇴진 합의'와 같은 대타협안이 나올 수도 있다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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