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은평구청 부근 교차로 가운데에 돌덩이 하나가 세워져 있다. 앞면에는 '바르게 살자', 뒷면에는 '바르게 살면 미래가 보인다'고 새겨져 있다. 새마을 운동할 때 '잘살아 보세'와 '하면 된다'가 있었고, 반공 시절에 멸공 승공 같은 구호가 있었지만 21세기에 '바르게 살자'는 아무리 봐도 뜬금없다.
관변단체인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가 세운 이 표지석은 서울ㆍ경기에만 수 십 개, 전국적으로 수백 개가 있다. 이 협의회는 행정자치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받아 1,000개 건립을 목표로 1999년부터 전국에 표지석을 세우고 있다.
이 표지석은 주로 시민들의 왕래가 잦은 도심이나 시골 마을의 입구, 등산로 등에 세워지면서 도시 미관과 자연 경관을 해치고 있다.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은 별다른 조형적 가치가 없다.
표지석의 형태가 조형적으로 시각 공해라면 '바르게 살자'는 내용은 정신 공해다. 이 표지석 앞에서는 누구나 불량시민이 된다. 불량시민은 교화와 계도의 대상이다. 재치 있는 젊은이들은 이 돌 밑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든 채 벌 받는 어린이 모습을 연출하며 희화화 한다. 표지석 사진을 삐뚤게 찍어 '바르게 살자'는 의미를 비틀기도 한다.
시민들은 '바르게 살자' 표지석을 보면 조폭의 팔뚝에 새겨진 '차카게 살자'가 떠오른다고 한다. 삼청교육대식 폭력으로 나타났던 1980년대 '정의사회 구현'의 경험 때문이기도 하다. 그 '정의사회 구현'이 권력자들의 위선을 가리는 수단이었음을 상기한다면 '바르게 살자'가 어떤 폭력성과 위선을 은폐하고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표지석은 소설 의 건달 임종술이 완장 차고 마을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처럼 도덕을 무기로 시민들을 길들이려 든다. 겉으로는 '바르게 살자'고 도덕적 가치를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체제에 따를 것을 지시한다. 질서에 순응하면 미래가 보이고 따르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고 강권한다. 그 미래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부산 저축은행 사건만 보아도 '바르게 살자'는 구호가 '정의사회 구현' 만큼이나 허구임이 드러난다. 이 사건의 피해자들은 사회적 약자들이다. 평생 도덕을 지키며 바르게 살아온 서민들은 피해를 입고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기득권층은 번성한다. '바르게 살면 미래가 보인다'더니 지금 저축은행 피해자들은 미래가 캄캄하다. '바르게 살자'구호는 선량한 시민을 기만하고 기득권층의 부도덕을 숨겨주는 위장막이다.
우리 시대의 서글픈 모습 중 하나는 시골 촌로들이 마을 입구에 '바르게 살자' 표지석을 세우고 제막식 하는 장면이다. 법 없이도 살 분들이 누구를 위해 그 돌을 세우는가.
이수광의 수필에 영양실조로 병을 앓던 여공 이야기가 있다. 의대생 오빠를 의사 만드느라 학비를 조달하며 라면으로 끼니 때우던 그녀가 몸져눕는다. 병원에 입원한 그녀는 영양실조가 아니라 납중독으로 죽었다. 일하던 공장은 근로자를 보호할 시설도 없이 납을 취급했다. 그녀의 방에서 짐 정리하던 사람들 눈에 서툴게 벽에 써 붙인 글귀가 보였다. '바르게 살자'다.
'바르게 살자' 표지석이 불필요한 것만은 아니다. 세우는 장소가 잘못됐을 뿐이다. 그 돌멩이는 시민들 다니는 곳에 세우지 말고 힘 있는 사람들 다니는 곳에 세우면 좋겠다. 그러면 나 같은 시민들도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에 가입할 것이다. 지도층이 모범을 보이면 그런 돌멩이 1,000개씩 세우지 않아도 나라의 정신이 바르게 선다.
전강옥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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