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靑이 나를 촛불시위 주도자로 착각해서 희망제작소에 기업후원 끊기지 않았나 싶다"
희망제작소라는 시민단체가 생겼을 때 개인적으로 관심이 갔던 것은 그 이름이었다. 목적성 혹은 성격을 드러내는 연대, 연합, 운동이라는 단어가 빠진 것도 특이했지만 그 이름처럼 정말로 희망을 제작할 수 있을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희망제작소 출범의 주역이 박원순 변호사였다는 사실 또한 특별했다. 참여연대의 사무처장을 거쳐 아름다운재단, 아름다운가게를 탄생시킨 그가 또 어떤 단체를 꾸리려는지 궁금증이 더했던 것이다.
구호를 외치는 대신 정책대안을 내놓겠다며 2006년 발족한 희망제작소가 5년이 됐다. 그 정도 시간이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선 이견이 있겠지만, 그래도 그 사이 이 단체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여러 아이디어를 세상에 내놓았다. 거기에는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로 있는 박 변호사의 역할이 컸다.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희망제작소 사무실에서 만난 박 상임이사는 그들이 보낸 5년의 시간과, 한국 사회에 대한 여러 생각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려주었다.
_희망제작소가 5년이 지났다. 이 단체를 왜 만들었나.
"언젠가 실학에 대한 책을 몽땅 읽은 적이 있다. 임진왜란 이후 어떤 식으로 사회를 개조하고 혁신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종래의 유교가 관변적, 사변적이고 추상적 논쟁에 기울었던 것을 반성하면서 사회를 실질적으로 변화시킬 방법을 모색했다. 희망제작소는 21세기 실학운동을 표방했다. 시민사회적 관점, 공공적 관점을 갖는 연구소이자 실천적 싱크탱크를 지향했다. 아시다시피 한국은 총론은 강하지만 각론이 약하고 추상적 슬로건이 많다. 우리는 미래를 대비한 구체적 콘텐츠를 제시하고 싶었다. 이념에도 휘둘리지 않았다."
_이름을 희망제작소로 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양극화가 심화한 한국사회에는 상대적 절망이 매우 크다. 기대는 큰데 현실이 따라가지 못해 생기는 절망이다. 그럴수록 희망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제작이라는 단어에는 낙관성이 들어있다. 하늘이 희망을 던져 주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희망을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그냥 연구소라고 하면 밋밋하지 않은가."
_그런데 정작 사무실이 있는 이 동네에는 희망제작소가 뭣 하는 곳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이름은 내가 지었다. 이 이름을 보여주니 일본 기업 히다치(日立)제작소를 연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공작소, 발전소 이런 것을 떠올리기도 하더라."
_5년을 돌아보면, 처음 목적했던 일을 충분히 했다고 보는가.
"욕심이 컸기 때문인지 충분히라고 말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제법 성과는 있었다."
_어떤 게 있나.
"행복설계아카데미라고 은퇴자 프로그램이 있다. 은퇴자의 재취업을 두고 정부도 고민은 하지만 우리와는 관점이 다르다. 정부는 시장에서 은퇴한 사람을 다시 시장으로 돌려 보내려 한다. 하지만 우리는 비영리단체 취업을 추진했다. 미국은 국내총생산(GDP)의 7%를 비영리단체에서 창출한다. GDP의 7%라면 어마어마한 규모다. 행복설계아카데미에서 3개월간 은퇴자를 교육시켜서 비영리단체에 취업할 수 있도록 했다. 김수종 전 한국일보 주필도 그 중 한 명이다. 460여명이 교육을 받았는데 절반 정도 취업했다. 사회적 기업도 일곱 개를 만들었다."
_마을 단위 기업인 커뮤니티 비즈니스 사업은 또 어떤 것인가.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소재나 계기를 찾는 비즈니스다. 그 좋은 사례가 전북 완주군에 있다. 지난 4년 동안 완주군의 마을들을 조사하고 주민과 공무원을 교육시켜서 100개 정도의 마을 기업이 만들어지도록 했다. 도시락을 만들거나 찜질방을 운영하거나 지역 음식을 만드는 식으로 마을마다 고유한 사업을 하고 있다. 연매출 10억 원에 이르는 곳도 있다. 완주군의 사례가 알려진 뒤 지금은 그곳을 견학하려는 사람들이 밀려들고 있다. 견학 수요를 맞추기 위해 별도의 여행사가 설립됐을 정도다."
_커뮤니티 비즈니스도 그렇지만, 희망제작소는 마을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그렇다. 한국에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양극화도 있지만 중앙과 지역, 도시와 농촌 등 여러 측면의 양극화가 있다. 양극화 때문에 일어난 현상 가운데 하나가 마을공동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어두운 밤에 혼자서 비단옷 입고 걸어가면 뭐하나. 사람은 소통과 관계의 존재인데 이웃과 단절되고 앞뒷집 사람과 인사 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있을까.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옛날에는 온 동네가 아이를 키웠다. 집 밖에 ぐ「?동네 아저씨들이 머리 쓰다듬거나 나무라거나 그랬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일이 없다. 그것이 안타까워 마을공동체를 만들자는 운동을 하는 것이다."
_시골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공동체를 만들 수 있나.
"당연하다. 어떤 면에서는 도시가 더 쉬울 수 있다. 농촌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 반면 도시는 사람이 많다. 잘려진 끈을 이으면 된다."
_도시 모델의 예를 들자면.
"울산 북구와 함께 만들고 있다. 완주의 농촌형 모델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_서울에서도 가능할까.
"물론이다. 종로구 창신동이 후보다. 그곳에는 봉제공장이 많고 봉제일 하는 사람도 1만7,000명이나 된다. 그곳 사람들이 일본식 용어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말을 알아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서울의 별동네다. 신기하지 않은가. 봉제공장뿐 아니라 포목상 등 관련 상점이 즐비하다. 그곳에서 만든 제품을 판매하는 대형 시장들도 근처에 있다. 동대문시장 같은 곳 말이다. 그런 것들을 다 연결하면 어떨까. 제주도에만 올레길 낼 게 아니라 창신동에도 올레길 낼 수 있다고 본다. 일본 관광객들이 그 길을 걷다가 옷 한 벌 맞추고 출국할 때 공항에서 찾아가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50년 이상 봉제공장에서 일한 사람들이 가이드하고, 봉제박물관도 만들고."
_그게 아이디어 차원인가 아니면 실제 움직임이 있는가.
"움직임이 있다. 전태일 열사의 누이 전순옥씨가 운영하는 '참신나는옷'이라는 사회적 기업이 관심을 갖고 있으며 문국현 전 국회의원도 흥미를 보인다. 얼마 전에 창신동을 걸으며 가능성을 살폈다. 종로구청장, 종로구의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어떤가. 창신동봉제마을."
_마을을 중심으로 하는 기업도 일종의 사회적 기업이다. 하지만 사회적 기업의 지속가능성, 우수 인력 확보 가능성을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까 사업 아이템의 경쟁력이 중요하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인재 육성도 물론 필요하다. 거기에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것이 중간지원기관이다. 행정기관과 마을을 이어줄 기관이 필요하다."
_최근에는 '박원순의 희망열차'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데.
"우리 지역에 한번 찾아와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많다. 꼭 그게 아니라도, 희망제작소는 지역과 마을을 소중하게 여긴다. 마침 창립 5주년이 되고 했으니 이 기회에 지역에 한번 내려가 그곳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이야기를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다. 3월부터는 지역에 내려가 일주일 정도 그곳에서 먹고 자며 강연도 하고 멘토링도 하고 간담회도 한다.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에 갔고 곧 제주도에도 내려가려고 한다. 경기도는 서울과 가까우니까 뺐다."
_새로운 직업 만들기에도 열심이라고 하더라. 소셜 디자이너(social designer)라고 불리는 것도 그 때문인가.
"젊은이들이 일자리 때문에 고민이 많다. 다들 대기업에 들어가려 하거나 공무원이 되려 하기 때문에 취업이 쉽지 않다. 하지만 누구나 두드리는 곳을 또 두드리면 그 문을 쉽게 열기가 어렵다. 그래서 발상을 바꿔 이런 일에 도전해보라며 1,000개의 직업을 만들었다. 물 소믈리에, 싱글족을 위한 심부름센터, 효도대행사, 말벗 전문가...서울, 수원, 전주에서 여섯 시간씩 공연을 하면서 이들 직업을 소개하는 '세상을 바꾸는 천개의 직업' 행사도 열었다. 그때마다 수천명의 젊은이가 왔다."
_특이하면서도 생소한 직업들이다.
"혼자 사는 가구가 전체 가구의 4분의 1이다. 1인 가구는 더 늘어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한 일을 구상하면 여러 가지가 떠오른다. 옷장, 소파 같은 것도 1인용으로 작게 만들면 된다. 싱글족을 위한 소형 가구제작소다. 홀로 외롭게 사는 노인들과 대화하는 것도 일이 될 수 있다. 그것이 말벗 전문가다. 사회의 흐름을 읽으면 새 직업을 만들 수 있다."
_아이디어가 신선하고 파격적이기는 한데, 과연 수입이 어느 정도 될지, 그래서 직업으로 지속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내가 2002년 아름다운가게를 시작할 때 대부분 하지 말라고 말렸다. 이미 사용했던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인데, 뜻은 좋지만 과연 그런 물건을 누가 사겠느냐는 것이었다. 지금 아름다운가게가 1년에 25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25% 안팎의 수익률을 보인다. 그렇게 번 돈으로 가난한 사람과 풀뿌리 단체를 돕는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는 누구나 성공 가능성을 걱정한다. 하지만 집중하고 머리를 짜내면 수익 모델을 만들 수 있다. 고정관념을 버리고 과감하게 도전해야 한다."
_그런데 정작 희망제작소는 재정 문제 때문에 한동안 어려움을 겪지 않았나.
"우리는 창립할 때 정부, 기업, 민간단체 등과 협력해 일을 하기로 했다. 함께 하면 훨씬 더 잘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고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게 어려워졌다."
_전?국정원이 기업 후원 등을 막았다고 했는데 그것을 말하는가.
"그렇다. 사실 희망제작소는 운동집단도 아니고 성명서 한번 낸 적이 없다. 정치적 색채가 없는 단체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기업 후원을 받아 하기로 한 사업이 끊어졌다. 하나은행이 300억원 투자해 하나희망재단 만들어 소액대출사업을 하기로 했는데 그것도 중단됐다. 지금도 강연하러 가면 경찰에서 연락이 온다고 한다. 대한민국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_그때 왜 그런 사업이 중단됐다고 보는가.
"그건 국정원에 물어보아야지. 바보 같은 정부라고 생각한다. 잘 하는 민간을 부추겨서 더 잘하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 어딘가에서 내가 촛불시위에 가담했기 때문에 그랬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다. 하지만 나이로 보나, 희망제작소의 성격으로 보나 내가 촛불 시위를 주도할 처지가 아니었다. 촛불시위의 중심은 온라인의 네티즌이었다. 그런데 나를 촛불시위 주동자 중 한 명으로 지목했다니 의아했다. 곰곰 생각하다 박원석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이 떠올랐다. 그는 촛불시위로 수배까지 받았다. 이름이 비슷하다 보니 청와대가 나를 박원석으로 착각했던 것은 아닐까."
_국정원이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제기했는데 어떻게 됐나.
"1심에서 원고인 국정원이 패소했다."
_재정적으로 힘들었다고 들었는데.
"기업 후원이 끊어졌으니 굉장히 어려웠다. 희망제작소는 기업과 지방정부를 대상으로 컨설팅도 하고 강의도 하면서 수익을 올렸다. 그런데 기업이 우리에게서 등을 돌렸으니 그럴 수 밖에."
_얼마나 어려웠는가.
"그래서 2009년에 비상경영위원회를 꾸렸다. 서울 도심 수송동에 있던 사무실도 그때 임대료가 싼 평창동으로 옮겼다. 사람도 많이 나갔다. 하지만 지금은 다시 복원됐다. 기업 후원은 끊어졌어도 개인 회원이 늘었다. 현재 7,000명이 넘는다. 우리의 1년 매출이 40억원 정도되는데 월 2억5,000만원에서 3억원 정도 지출하니까 그럭저럭 꾸려나갈 수 있다. 회원 구조가 정착됐으므로 결과적으로 잘 된 것일 수 있다. 기업은 겁이 나니까 아직은 우리와 적극적으로 함께 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중소기업이나 외국계 기업은 조금씩 우리와 일을 함께 한다."
_회원들에게 김치찌개를 끓여주는데.
"우리가 어려울 때 개인 회원들이 도움을 주었다. 매달 1만, 2만원씩 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고마움에 답하기 위해 서비스를 하는 것이다. 내가 회원들을 불러 김치찌개를 대접한다."
_참여연대, 아름다운재단,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 이런 단체들의 발족에 다 관여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박원순이라는 이름이 단체보다 더 부각됐다. 만약 박원순 상임이사가 떠나도 희망제작소가 지금처럼 굴러갈 수 있을까.
"참여연대, 아름다운재단, 아름다운가게 다 내가 떠났어도 잘 굴러간다. 팀워크, 사업, 수익모델 이런 것들만 정착되면 내가 없어도 된다. 나는 이미 1년 전부터 희망제작소의 일상 업무에서 빠져 있다. 참여연대 사무처장 그만 둘 때 간사들의 반대가 심했다. 그만 두는데 1년 걸렸다. 그러나 지금은 오라는 소리도 하지 않는다. 언론도 조금 협조해주어야 한다. 인터뷰를 할 때도 우리 단체의 국장, 간사와는 하지 않고 꼭 나처럼 이미 알려진 사람과만 하겠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나만 또 부각되는 것이다."
_요즘도 정치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가.
"세상의 좋은 변화를 만드는 게 내 목표다. 내 방식대로 일을 했고 비교적 잘 해왔다고 생각한다. 그랬더니 정치권에서 나를 데려가려는 분위기가 있었다. 과거보다는 덜하지만 지금도 정치할 생각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기는 있다."
_개인 돈벌이는 어떻게 하나.
"강연도 하고. 포스코 사외이사도 했는데 그때 번 돈은 내가 쓰지 않고 아름다운재단의 조합을 만드는데 썼다. 내 처가 작은 인테리어업을 하기 때문에 그것으로 먹고 산다. 사실 단체를 새로 차릴 때는 월급 받아갈 처지가 못 된다. 오히려 돈을 내놓아야 한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틀이 잡히면 월급을 받아간다. 그래야 후임자가 와서 일을 할 수 있다. 시민운동을 해도 절대 굶지 않는다. 기업처럼 많은 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신나게 일할 수 있다. 나는 징검다리 휴일은 그 중간의 근무일까지도 쉬게 한다. 안식월이 3년, 5년에 한번씩 있고 10년마다 안식년도 있다. 이 정도면 일 할만 하지 않은가."
_얼마 전에는 복지문제를 놓고 논쟁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한국 사회의 모델 혹은 한국 사회의 모습이 있는가.
"창조적인 사람이 일할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한다. 20세기형 굴뚝산업, 토건산업이 아니라 창조와 혁신, 문화와 예술, 시민단체(NGO)와의 파트너십 이런 것들을 존중하는 그런 세상이 돼야 한다. 그래서 다양한 가치가 약동해야 한다."
■ 박원순 상임이사/ 1년의 30%는 외국에서…1년의 50%는 집에 못 들어가
박원순 상임이사와 인터뷰를 하기로 약속은 했지만 정확한 시간을 잡기는 쉽지 않았다. 그의 일과는 대개 밤 늦게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많으며 조찬 모임이 있을 때는 새벽부터 서둘러야 한다. 그의 일지에는 하루 스케줄이 적혀 있는데 매일 10건 안팎의 약속이 잡혀 있다. 기자와 만난 5월 25일은 좀 한가한 편이었는데도 8건의 약속이 잡혀 있었다.
박 상임이사는 1년 중 4분의 1 또는 3분의 1은 외국에서 보낸다. 세계재단협의회, 아시아재단협의회 등의 임원을 맡고 있는데다 뉴욕희망제작소, 뉴욕아름다운재단, 북가주아름다운재단 등 해외의 관련 업무를 하자면, 또 지자체장 및 공무원들과 함께 해외 연수를 하자면 그 정도 시간을 외국에서 보내야 한다.
국내에서도 지방 가는 일이 많다. 서울에 있어도 일이 밀리면 사무실에서 잠을 잔다. 사무실 그의 방 책상 앞 1평이 채 안 되는 바닥이 야전침대를 놓는 곳이다. 그렇게 해서 일년의 절반 정도는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데도 아내로부터 큰 미움은 받지 않는다며 웃는다.
● 약력
1956년 경남 창녕 출생
1974년 경기고 졸업
1979년 단국대 사학과 졸업
1982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
1986년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
1996~2002년 참여연대 사무처장
2000~2009년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2001년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공동운영위원장
2001~2009년 아름다운가게 총괄상임이사
2003년 검찰인사위원회 위원, 사법개혁위원회 위원
2006년~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한국여성단체연합회 여성운동상, 제15회 심산상, 막사이사이상 공공부문 등 수상
■ "호칭? 그냥 원순씨라 불러주오…그래야 남과 동등해지는 느낌"
'뭐라고 불러야 할까.'
박원순 상임이사를 만날 때 호칭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이 많다. 참여연대 사무처장이었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를 '처장님'이라고 부른다. 변호사 경력을 떠올리는 사람은 '변호사님'이라 하고, 여러 기구의 위원장을 맡았던 점을 기억하는 사람은 '위원장님'이라고 부른다. 희망제작소의 직함을 착각해 '이사장님', '회장님', '대표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정작 희망제작소 사람들은 그를 '원순씨'라고 부른다. 그가 그렇게 불러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박 상임이사는 2006년 희망제작소를 만들기 전에 컨설팅회사 매킨지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그곳의 책임자 최정규씨를 아래 직원들이 그냥 '정규씨'라고 부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그냥 따라 한 것이다.
"나를 부르는 사람들이 호칭 때문에 고민하지 않도록 그렇게 불러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이상했는데 들을수록 좋았다."
희망제작소에서도 젊은 사람들은 스스럼 없이 원순씨라고 했지만 나이든 사람들은 그런 호칭을 조심스러워 했다. 외부인 가운데서도 젊은이들은 편하게 원순씨라고 하지만 나이든 사람들은 어색한 반응을 보인다. 박 상임이사는 "원순씨라고 불러주니 젊음을 찾고 다른 사람과 동등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인터뷰=박광희 편집위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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