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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1492년 타자의 은폐' 유럽의 계몽 논리에 묻힌 라틴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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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1492년 타자의 은폐' 유럽의 계몽 논리에 묻힌 라틴아메리카

입력
2011.05.27 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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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 타자의 은폐/엔리케 두셀 지음·박병규 옮김/그린비 발행·272쪽·1만8,000원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1992년, 아메리카 대륙 발견 500주년을 맞이해 '복음화 500주년 기념 축제'가 벌어졌던 이날을 아메리카 인디오들은 자신들의 제삿날에 비유했다. 또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 부사령관 마르코스는 자신의 나이가 500세가 넘었다고 말한다.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대륙 도착 이후 계속된 수탈과 저항의 역사를 자신의 나이로 삼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1492년의 의미는 무엇인가?

<1492년 타자의 은폐>는 세계적 석학이며 해방철학의 창시자인 엔리케 두셀의 대표작으로 아메리카 대륙 발견 500주년을 얼마 앞두고 프랑크푸르트에서 열었던 강연을 책으로 묶어낸 것이다. 이 책은 이슬람 세계의 변방에 불과하던 유럽이 1492년 이래 라틴아메리카를 정복하고 세계사의 중심에 서게 된 과정을 타자의 관점, 즉 억압받았던 민중의 삶과 역사를 통해 새롭게 서술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그 기원에서부터 배타성과 폭력성을 감추고 있는 근대성의 신화를 벗겨 냄으로써 억압과 수탈의 구조로부터 타자를 해방시킬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60년대 후반부터 해방신학 종속이론 탈식민주의 등 라틴아메리카의 비판적 사상을 만들어 가고 전파하는 데 앞장서 왔을 뿐 아니라, 해방철학으로 세계적 명성이 높은 두셀이지만 국내에서는 그의 책이 제대로 번역돼 있지 않았다. 이 책의 출간으로 소문만 무성했던 해방철학의 구체적 면모를 직접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발견으로 해석되는 1492년의 사건을 은폐라는 개념으로 재해석한다. 라틴아메리카에 도착한 유럽인들은 타자를 발견했지만 이들이 지닌 차이를 수용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이 지역의 고유한 철학과 가치, 원주민의 정신세계를 철저히 대상화해 야만 열등 미개라고 규정하고, 그 위에 서구의 것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흡수되거나 통합되지 않는 것을 제거하면서 말이다.

결과적으로 라틴아메리카의 타자성은 계몽의 논리 속에 은폐돼 버리고 말았다. 라틴아메리카 고유의 역사 역시 1492년 당시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상당 부분 은폐돼 있다. 라틴아메리카 인디오들이 아메리카대륙의 발견 이후가 돼서야 겨우 세계사에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서술은 유럽 중심적 시각의 오만함을 드러내 주는 일례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1492년 이전의 세계지도와 역사적 기록물을 통해 유럽이 이전까지의 세계의 변방에 지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동시에 아메리카대륙의 고유한 역사를 밝히고 있다. 저자는 객관화된 가치, 익명의 상품으로 이전, 서구의 근대화에 흡수돼 버린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의 처절했던 삶을 드러내는 데 주력했고, 그들을 해방시키고자 묵묵히 자신의 철학적 작업을 수행해 왔다.

이 같은 역사적 서술 속에서 저자는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구조화한 빈곤 문제가 국지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전 지구적인 근대화의 기획과 맞물려 있음을 다시 한번 명확하게 밝힌다. 그리고 과거 식민지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비유럽적 타자를 질곡에 빠뜨리는 이러한 근대의 문제를 해방기획(억압받는 민중의 물적 삶과 언어를 회복)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사정원 기자 sjw@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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