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역사다/이영석 민유기 등 지음/서해문집 발행·312쪽·1만5,000원
'알라스앙해닌(阿拉上海人).' '우리 상하이 사람'이라는 뜻으로 중국 상하이 사람들이 타 지역 사람들에 대해 갖는 우월감을 풍자적으로 묘사하는 데 쓰이는 말이다. 천지개벽을 일으키며 세계 경제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는 상하이. 그러나 불과 100여년 전만 해도 스스로 상하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별로 없었다.
<도시는 역사다> 는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는 지구도시화(glurbanization)의 시대에 세계 주요 도시의 역사를 살핀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서울 도쿄(東京) 오사카(大阪) 베이징(北京) 상하이, 유럽의 파리 런던 베를린 상트페테르부르크, 미국의 시카고까지 동양 도시 5곳과 서양 도시 5곳을 선택했다. 이들 도시의 기원과 성장 과정, 공간 구조, 사회 갈등, 도시 문화 등을 보여 준다. 도시는>
현재 상하이에서 1843년 개항 이전 시기의 역사적 자취를 찾기란 쉽지 않다. 상하이의 성벽은 신해혁명 직후인 1912년 철거돼 그 자리에 도로가 건설됐다. 김승욱 서울시립대 HK교수는 상하이의 역사는 도시 실험의 역사라고 본다. 개항 이후 외국인들에 의해 조계(租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도시 건설은 중국인들에게 새로운 도시 유형을 제시해 줬다. 상하이는 1900년대 초 중국 연해와 양쯔(揚子)강 유역, 동아시아와 세계 주요 항구도시를 연결하는 물류, 교역 네트워크의 중심이 됐다.
1927년 수립된 상하이특별시는 대상하이계획으로 조계 지역과 기존 현성(縣城) 지역의 도시 통합 실험을 했지만 중일전쟁을 겪으면서 중단됐다. 중국 개방 이후 90년대 추진된 푸둥(浦東)개발도 상하이 내 지역 간 격차를 극복하기 위한 실험이었다.
개항 당시 20만명에서 49년 현 중국 정권 수립 때 546만명으로 100년 만에 인구가 20배 이상 증가했으나 이들 대다수는 외지인이였으므로 상하이는 극단적 이민사회였다. 상하이 사람들의 정체성이 단일화된 것은 58년 호적관리제도 시행으로 인구 유입이 막힌 이후였으며, 이때부터 상하이인은 고정적 집단이 되었다. 김 교수는 상하이에서 진행된 사회적 실험은 지구화로 다양한 집단 간의 공존이 절실해진 오늘의 상황에서도 되돌아볼 만한 의미있는 사례라고 밝히고 있다.
도쿄는 도쿠가와(德川) 막부에서 행정의 중심지였으나 1869년 왕정복고 이후 천황제의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박삼헌 건국대 교수는 "메이지(明治)천황이 거처를 옮긴 후 도쿄가 국가 행정 및 상징적 차원의 수도 기능을 갖춘 도시로 건설됐다"며 그 대표적 공간으로 니쥬바시(二重橋)로 유명한 황거(천황의 거처) 앞 광장을 예로 든다. 황거 쪽에서 보면 왼쪽에는 야스쿠니(靖國)신사, 정면에는 일본 자본주의의 중심인 마루노우치(丸の內), 오른쪽에는 행정부와 국회 등이 들어서 있는 나가타초(永田町)와 카스미가세키(霞が関)가 있어 황거 앞 광장이 일본의 국가 이념, 행정, 경제를 서로 연결시켜 주는 교차로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서울에 대해서는 김백영 광운대 교수가 다섯 시기로 나누어 살펴본다. 조선 초'양반과 군자의 도시'로 건설됐지만 후기에는 인구 급증으로 '상인과 서민의 도시'로 바뀌었다. 개항 이후 대한제국 시절 '황제의 도시'로서 변화를 시도했지만 식민지가 되자 '일본인의 도시'경성으로 변모했다. 김 교수는 60년대 이후 서울의 성장이 전형적 제3세계 과잉도시화 양상을 띄며, 대규모의 아파트 단지들은 한국 경제의 기적적인 양적 성장이 도시민의 일상을 천편일률적인 노동 중독 생활양식으로 내몰았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지적한다.
저자들은 도시사학회 소속의 학자들이지만 평이한 문체로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아 깊이는 있지만 그다지 어렵지 않게 읽힌다.
남경욱기자 kwn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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