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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인사이드/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영토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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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인사이드/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영토전쟁

입력
2011.05.27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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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바마의 '67년 이전 국경' 카드, 유대인 압력에 굴복

국제 사회엔 난제가 수두룩하지만 그 중에서도 해결이 가장 어려운 것을 꼽는다면 단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이다. 9ㆍ11 테러의 주모자인 오사마 빈 라덴의 제거로 자신감을 얻은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최근 “양측의 국경선 획정은 3차 중동전쟁이 발발한 1967년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오래된 숙제가 다시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당장 미국 내 유대인과 공화당이 강력한 반발을 표출하고, 당사자인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조차 제안의 현실성에 우려를 나타내는 등 문제가 해결되긴커녕 오히려 더 꼬이는 형국이다.

이스라엘 총리보다 무서운 미국 유대인

오바마 대통령이 19일 양측의 국경선 획정을 ‘67년 이전으로 돌릴 것’을 주창하고 나선 것은 상당한 정치적 위험을 무릅쓴 것이다. 미국 대통령으로는 금기 사항이나 마찬가지인 ‘67년 이전 국경선’을 처음으로 거론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반발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더구나 다음날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방미가 예정돼 있었다. 오바마 대통령으로서는 작심하고 얘기를 꺼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랬던 오바마 대통령이 며칠도 못 가 한 발 물러서는 모양새를 취했다. 22일 친 이스라엘 로비 단체인 ‘미국ㆍ이스라엘 공공문제위원회’(AIPAC) 연례회의에 참가해서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내 제안은 67년 국경선을 근거로 양측이 협상해야 한다는 뜻이지 그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는 19일 ‘67년 이전 국경선’ 발언에서 한 발 물러선 것이다.

오바마는 왜 후퇴할 수 밖에 없었을까. 일단 미국이 자국 내 유대인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새삼 확인됐다. 미국 내 유대인은 3억명이 넘는 전체 인구의 2%인 600만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주요 은행 요직을 차지하는 등 금융권을 장악하고 있고, 이를 무기 삼아 로비를 통해서 의회 의원과 정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미 국무부는‘제2 이스라엘 외무부’라는 비유가 나올 정도다. 실제로 오바마 대통령도 자신이 정책 자문을 받는 데 의지하는 유대인 지지자 중 한 명인 리 루센버그가 AIPAC 의장일 정도로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67년 이전 회귀’발언 이후 정치적으로 고립된 오바마 대통령이 AIPAC에서 말한 ‘협상을 통한 상호 합의’는 이 문제를 다룰 때 한 세대 동안 사용된 전형적 공식”이라며 유대계의 압력에 굴복한 오바마의 후퇴를 꼬집었다.

이 “민족 생존 위해” vs 팔 “살던 땅에 살기 위해” 해법 없는 충돌

이스라엘ㆍ팔레스타인 영토 문제가 풀기 어려운 것은 양측 주장이 모두 일리가 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수백만명이 학살된 유대인들은 민족주의 ‘시오니즘’의 기치 아래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아랍 민족들이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몰려들어 이스라엘을 세웠다.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아랍국들은 이스라엘과 모두 4차례의 전쟁을 치렀고, 이스라엘은 힘겹게 나라를 지켜왔다. 특히 1967년 3차 중동전쟁 승리 후 영토가 비약적으로 확대됐다. 이 때문에 “국가의 생존과 안보를 위해 67년 경계 이전으로 국경선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게 이스라엘 입장이다.

원래 살던 땅에 살게 해 달라는 팔레스타인들의 주장도 절박하고 정당하다. 팔레스타인이란 말 자체가 지중해 동쪽의 현 이스라엘 지역을 의미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은 기원전 15세기 이전부터 이곳에 살고 있었다.

강대국과 국제기구들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제1차 세계대전 말 오스만제국 붕괴로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게 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영국은 아랍인들의 염원을 진전시키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그러나 17년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겠다는 벨퓨어 선언을 하고 1947년 유엔 총회에서 유대국과 아랍국 영토 분할 승인을 주도하기까지 한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현실적인 고민 끝에 내린 ‘영토와 안보의 교환’. 고뇌의 산물이지만 강대국들이 팔레스타인을 분할한 원죄를 뛰어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강대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복잡한 영토문제가 발생했고, 지난한 해결 과정 또한 거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분쟁문제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배성재기자 passion@hk.co.kr

■ 이스라엘 영토, 4차례 전쟁 통해 계속 확대

유대민족은 기원전 수천년 동안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왕국의 건설과 통일 및 분열을 계속하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속주로 편입된 후 멸망했다. 2,000년 가까이 나라 없이 전세계서 흩어져 지내던 유대민족은 우여곡절 끝에 1948년 팔레스타인지역에 유대민족 국가인 이스라엘을 탄생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영토는 변천을 거듭했다.

특히 국경선은 네 차례에 걸친 아랍국가와의 전쟁으로 크게 바뀌었다.

첫번째 전쟁은 48년 5월 이스라엘이 국가를 건국한 지 얼마 안 돼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아랍국가들이 침공하며 발발했다. 1차 전쟁 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국경선은 영국이 위임통치하고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을 56.47대 42.88의 비율로 나눈 것이었다. 그러나 1차 이스라엘-아랍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78%까지 영토를 확대했다.

이집트의 수에즈운하 국유화로 56년 10월 말 발생한 2차 중동전쟁도 이스라엘의 승리였다. 이스라엘 영국 프랑스 연합군은 수에즈운하를 11월 6일 점령했다. 이후 유엔의 철군 요구로 영국과 프랑스는 철수했지만 이스라엘은 57년 3월까지 이곳을 계속 강점했다.

이스라엘 영토의 비약적인 확대가 이뤄진 것은 3차 중동전쟁이었다. 67년 6월4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테러에 대한 응징을 명분으로 기습적인 선제공격을 시도했다. 이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이집트 소유였던 시나이반도와 가자지구, 시리아 소유의 골란고원, 요르단 소유의 요르단강 서안지구, 동예루살렘 등을 점령하며 8,600㎢의 면적을 영토로 새로 편입시켰다. 3차 전쟁 후 이스라엘의 영토는 독립 초기의 8배가 넘는 10만2,4000㎢로 확대됐다. '67년 이전 경계로 돌아가자'는 오바마 대통령의 제안은 이를 포기하란 얘기나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이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다.

이스라엘은 79년 이집트와 캠프 데이비드 평화협정을 맺고 3차 중동전쟁으로 점령한 시나이반도의 반환을 약속한 뒤 3년 뒤 철군으로 이 약속을 이행했다. 2005년에는 가자지구에서 철수함으로써 팔레스타인들이 자치권을 갖고 거주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팔레스타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는 이스라엘의 공격적인 정착촌 건설 정책으로 이미 수십만명에 이르는 이스라엘인들이 살고 있어 양측이 각각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는 상황이다.

배성재기자 passi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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