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ㆍ중소기업이 사업영역을 두고 다시 한번 격돌했다. 중기 업계는 모처럼 조성된 동반성장 분위기에 더해 8월로 예정된 동반성장위원회의 중소기업 적합업종 선정을 앞두고 이 참에 숨겨왔던 속앓이를 전부 쏟아낼 기세다.
한국레미콘협동조합은 26일 성명서를 내고 "레미콘 대기업이 부당하게 공공조달시장 진출을 가로막고 있다"며"정부의 동반성장 정책에 역행하는 횡포를 당장 중단하라"고 주장했다.
레미콘 사업은 2009년 중소기업자간 경쟁제품으로 지정되면서 공공조달 시장 등에 대기업이 참여할 수 없다. 하지만 11개 레미콘제조 대기업이 최근 "레미콘을 경쟁제품에서 빼달라"며 행정소송을 제기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법원은 확정 판결이 나올 때까지 레미콘은 직접구매대상품목의 적용을 받지 못하도록 하는 효력정지가처분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19일로 예정돼 있던 2011년 공공분야 레미콘 입찰이 무효가 됐다.
서상무 조합 회장은"민간 레미콘 시장은 11개 대기업이 독점하다시피 해 나머지 750여개 중소기업들은 그나마 공공분야에 기대고 있는 상황"이라며"공공분야 입찰이 무효가 되면서 업체들의 고통이 심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해당 레미콘 대기업들과 같은 계열사인 시멘트 업체들은 최근 일방적으로 시멘트 가격을 30%가량 인상해 중소업체들을 어려움에 빠뜨리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기업형슈퍼마켓(SSM), 소모성 자재 구매대행(MRO) 사업에 이어 네비게이션에 이르기까지 대ㆍ중소기업간 갈등이 여러 사업분야로 번져나가고 있다. 특히 중소기업이 주력하던 사업까지 대기업이 무분별하게 발을 넓히면서 존폐의 위기에 처하는 중기가 늘었다. 중기업계 반발의 강도도 그만큼 커지고 있다.
네비게이션 시장의 경우 지금까지 중소기업이 6,000억원 규모로 추정되는 시장의 80%를 점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삼성ㆍ현대차 등 대기업들이 계열사를 통해 시장에 참여하면서 갈등의 불씨를 던졌다. 두부 시장의 경우 기존의 풀무원외에 대상, CJ등이 추가로 사업에 진출한 이후 시장의 대부분이 대기업으로 넘어가고 있다.
최근 급성장한 시장은 예외가 없을 정도다. 막걸리 시장은 CJ, 오리온, 농심, 샘표 등이 제조ㆍ유통에 뛰어들었고, 상조업의 경우 삼성 에스원과 농협이 출사표를 냈다. KT자회사로 공중전화등을 관리해온 KT링크스는 최근 사업축소로 어려움을 겪자 원두커피머신(자판기) 보급사업에 나섰다.
문제는 대기업이 진출하는 분야가 신성장 사업이나 미래전략산업이 아니라는 데 있다. 대기업이 리스크가 큰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는 대신 상대적으로 안정적 수입을 올릴 수 있는 분야에 안주하면서 자칫 우리 경제 전체의 창의성과 활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적이 정부 내에서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대기업들은 투자보다는 현금 쌓기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4월 600대 기업의 올해 국내 투자실적과 계획을 조사한 결과 총투자 규모는 지난해보다 9.7% 늘어난 114조6,532억원으로 집계됐다. 반면 10대 그룹 상장 계열사 72곳의 지난해 말 내부유보율은 전년 보다 96.54%포인트 증가한 평균 1,219.45%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재계 1, 2위 기업인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경우 지난해 말 기준으로 현금성 자산은 각각 9조8,000억원, 1조8,000억원이었다. 세금을 내고 난 이익금의 60.6%와 33.7%에 이를 정도다.
중소기업이 어렵게 개척한 시장에 대기업이 진출하는 것은 더 큰 문제라는 지적이다. 스팀청소기의 경우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뒤늦게 발을 들여놨다. 두리화장품이 개척한 한방 샴푸 시장에도 LG생활건강, 아모레퍼시픽, 애경 등이 뛰어들었다.
한 중기 관계자는"애써 기술 혁신을 이뤘는데 막대한 자금과 유통망을 동원한 대기업에 시장을 빼앗겨야 한다면 누가 도전에 나서겠냐"며 "이러다 기업가 정신마저 찾기 어려워질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동현기자 nan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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